성요셉 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내적 순례 여정의 삶>이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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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읽은 두 글귀가 생각납니다.

어느 기자가 쌍십절 날 운동회가 열렸던

화교 학교 옆을 지나다 발견했다는 두 구절에 공감했습니다.

 

‘보천동경(普天同慶;하늘 아래 모두 다 같이 즐거우라.)’이라는 말과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알라)’라는 말이

그대로 오늘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은 경쟁만을 강조하다보니 예의를 잃었고,

투쟁을 강조하다보니 부끄러움을 잊었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로마서 독서 시 마지막 구절도 생각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8,21).

 

이미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 사도 바오로의 희망의 비전인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멸망의 사슬’의 힘은 여전합니다.

악순환의 사슬, 사탄의 사슬(시스템), 운명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자

몇이나 되겠습니까.

불교의 윤회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진보가 가능한지 묻고 싶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의 진리가 펼쳐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탄의 시스템에 희생된 무수한 자살자들입니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이전 상식과 양식의 기본이 실종된

야만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 같습니다.

 

“이 세대는 악하다.”

예수님이 오셔도 이 세대에 대한 진단은 예나 이제나 똑같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저는 이 사탄의 시스템,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런 깨달음을

어제 산티야고 순례를 하고 온 후배 신부의 체험을 통해 얻었습니다.

산티야고에 가지 않고도 귀한 살아있는 진리를 체득했습니다.

 

타고난 천사도 악마도 없고 이 둘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결론하여 끊임없는 내적 순례여정의 삶에 항구할 때 천사요

순례여정의 삶을 멈춰 안주할 때 악마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맑게 흐를 때는 천사지만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될 때 악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를 통과해 포르투칼 그리고 스페인까지 800km,

2000리 백두산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한 달 동안 끊임없이 걸었다 합니다.

“힘들지 않았습니까?”

 

저의 질문에 후배 신부는 줄줄이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하루 종일 들어도 계속될 것 같은 체험담이었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얼마 지나면서 힘들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곳곳에 산티야고를 가리키는 표지를 보면서 보람과 힘을 얻었습니다.

또 국적과 언어를 넘어 산티야고를 목표로 한

숱한 도반들인 순례 객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혼자 같았으면 이 순례여정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동일한 목표를 향하기에 다들 소탈하고 순수했습니다.

갈 때 마다 바뀌는 환경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지평선만 보고 걸었습니다.

지평선이 끝나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갈 때마다 산티야고를 가리키는 표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체험담을 듣는 순간

‘아, 이게 삶이구나. 내적여정 순례여정 중에 있는 우리 삶이구나.’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한 달, 이 천리의 산티야고 순례지만

우리의 순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순례구나.

공동체의 형제들은 공동순례여정의 도반들이요

매일의 일정한 시간 계속되는 미사와 성무일도는

하느님 목표를 가리키는 표지들이구나.

아니 공동전례기도만이 아니라

좋은 믿음의 도반들 역시 하느님 목표를 가리키는 표지구나.

 

이 공동전례기도와 도반들의 표지가 없으면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어 ‘지평선이 끝나면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처럼,

하루의 지평선이 끝나면

새 하늘과 새 땅, 새 날의 지평선이 열리는

매일의 순례여정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례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이자 믿음의 여정이요,

떠남의 여정이자 비움의 여정입니다.

 

이런 하느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내적여정의 삶일 때

남는 것은 하느님과 믿음뿐이요, 마음의 순수와 겸손, 진실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바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 이십니다.”

 

바로 이 하느님을 향한 내적 순례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궁극의 목표인 하느님을 잊어 안주할 때 악순환의 사슬에,

사탄의 시스템에 사로잡혀 본의 아니게 악마가 되든지

악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예언자들을 죽이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이 바로 악마 같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그대로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세대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엄중합니다.

 

반복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는 것이 진정한 회개요

주님 앞에 책임 있는 자세입니다.

 

악마와 천사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이런 게 악마야!’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생각납니다.

 

바다를 향해 아래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처럼,

개문유하(開門流下),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향해 아래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 순례여정의 삶일 때

온갖 사슬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의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내적 순례 여정 중인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을 향한 이정표가 되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