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순교자 대축일 : 루카 9,23-26 (17/09/17)

 

- 도입 :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걸 바쳤습니다. 가문의 명예나 재산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리고 산골짜기에 숨어살면서도 자식들에게 신앙만은 꼭 지키라고 당부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물려받았습니다. 가족이 몰살당해 대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고자 했던 신앙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키워가고 있는지요? 혹시 신앙의 가치를 모른 채/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닌지?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돌이켜 봅시다.

 

세상을 훔친 도둑들!

 

찬미예수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폭염이 갑자기 수그러들었는데, 지내기 괜찮았나요? 이렇게 갑자기 기온이 떨어질 줄이야... 어쩌면 영원에 비추어 본 우리네 인생도 찰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찰나의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듯이/ 이 땅에서의 영화를 위해 영원한 삶을 던져버렸다면 그것만큼 큰 안타까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진리를 찾던 선조들은 비록 그때/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길지라도/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시나브로 사라져버릴 것들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것을 희망할 수 있었는지?’ 선조들을 향한 하느님의 놀라운 돌보심이 느껴집니다.

 

1.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시작된 경위는 참으로 독특하지요. 세계 어느 곳이든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졌는데, 우리나라만큼은 선교사들이 아닌 신앙 선조들에 의해 천주교가 받아들여졌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매년 중국 황실에 사신을 보내어 국정을 보고하고 중대한 문제는 중국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치욕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계절 중에 성절사는 중국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신이었고, 천추사는 중국 황후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신이었으며, 지단사는 음력설을, 동지사는 추수한 햇곡식과 예물을 바치러 가는 사신이었습니다. 사신 일행은 정사 · 부사 · 서장관 · 통역관 · 군관 · 의원 참상 · 잡역 등 3백 명 내외로 구성되었는데, 사신 일행은 북경에 약 한 달간 머물면서 중국의 문화와 예술을 교류했습니다. 이 사절단을 통하여 중국의 많은 서적들이 조선에 들어왔는데, 그 중 서양 신부들이 한문으로 쓴 천주교 서적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판토자의 칠극’, 마이야의 성경광익’, 아담 샬의 주제군징.

 

당시 조선에는 사색당파 싸움으로 서로 모함하고 죽이는 꼴이 보기 싫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큰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의 대가였던 성호 이익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와 판토자 신부의 칠극을 읽고 서평까지 썼습니다. 그의 제자 안정복도 천주교 서적을 많이 읽고 열 세 종류의 책을 펴냈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1777년 겨울, 이익의 제자였던 권철신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천진암 주어사에서 10일 동안 삶의 의미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전통학문인 유학과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비교하여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 토론회에는 경기 양주군에 살던 젊은 선비들 곧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형제들과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과 이벽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토론회에서 알게 된 새로운 모든 것을 실천하기로 결의하고, 매일 아침저녁기도를 바치며/ 매월 7, 14, 21, 28일에는 만사 제쳐두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벽은 여러 차례 교리연구회를 열어 학자들과 다양한 토론을 해 봤지만, 책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몇몇 의문을 속 시원히 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중국 북경에 사람을 보내 교리를 철저히 배워 오도록 결의했습니다. 때마침 교리연구회원인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아들 승훈이를 따라 보내기로 결정했고, 27세 이승훈은 40일 가량 북경에 머물면서 프랑스 신부들과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17842월 드디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귀국하면서 많은 교리서와 성물, 묵주 등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날 이후 많은 실학자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조선천주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전주원 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264쪽 편집)

 

2. 그러나 기쁨도 잠시, 조선 정부는 이내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일찍이 정부를 향해 칼끝 한 번 겨눈 일이 없었지만,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이 나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며 만 명 아니 이 만 명도 넘는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대규모 학살에도 불구하고 무장 저항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조선 정부는 이런 순종적인 천주교 신자들을 왜 그렇게 가혹하게 박해했을까요?... 1801년 신유박해의 원인을 설명하는 논리 가운데 당시 집권당인 노론 벽파가 남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벌인 것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남인들 중에 천주교도가 많으니 남인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천주교를 쳤다는 것이죠. 실제로 천주교를 믿은 양반 신자 중에 남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천주교 박해의 근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반대당이 궤멸된 뒤에도 박해가 지속되었고, 권력자들이 아닌 너무도 많은 일반 백성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남인이 세력을 얻어 가던 정조 말년에도 박해가 있었고, 노론 벽파가 세력을 잃은 다음에도 박해가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천주교 박해는 집권 세력의 당색과 무관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은 왜 그렇게 엄청난 박해를 받았을까요?...

 

3.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도적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도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도둑, 강도와 성격이 다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적이지만, 나라를 훔치는 것도 도적입니다. 또 훔친 것도 도적이지만 훔치려고 한 것만으로도 도적이 됩니다. 마음속으로 훔치려는 생각만 가져도 도적입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포괄적인 의미에서 도적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를 더욱 거세게 몰아가게 한/ 계기가 된/ ‘황사영 백서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법부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국법에 조정의 신하와 역적은 의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은 오로지 도적을 맡습니다. 서민들은 죄가 있으면 형조에서 다스리는데, 교우들은 모두 서민인데도 포도청으로 잡혀 들어갑니다. 도적죄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의금부로 옮겨지는 사람들은 역적으로 처리됩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자들이 도대체 왜 도적과 역적이 되었는지, 천주교 신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훔쳤으며 나라에 무슨 해를 끼쳤는지 항변했지요.

 

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박해자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아버지와 임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위계가 모두 하느님 아래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군주의 성격상 임금 위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천주교는 그 위에 새로운 권력을 설정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천상 권력입니다. 천상 권력은 현실에서는 교회 권력으로 나타나는데, 이 땅에서 천상의 권리를 대리하고 있는 교회 권력과 왕권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죠.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도 유다인의 왕으로서 로마 황제의 권력에 도전한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서로가 우위를 주장하는 한 교회 권력과 현실 권력은 충돌을 피할 수 없겠지요. 조선의 지배 세력은 이런 본질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4. 하느님을 맨 위에 두는 위계질서는 임금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초기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이벽과 이승훈은 모두 가정 내 박해로 순교했습니다. 사실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는 말은 천주교에만 겨누어진 비판은 아니었습니다. 불교도 똑같은 비판을 받았지요. 그러나 불교는 천주교와 같은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천주교의 하느님은 불교처럼/ 기존의 다른 가치와 양립하며 포섭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천주교의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 뭐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겁니다. 애초부터 천주교는 다른 신앙 체계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상적 유교 이념을 믿으며 엄격히 이단을 배척해 온 조선에서 천주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미 엄격한 절대주의 이념인 성리학에 기초하고 있던 조선에서, 절대주의적인 천주교는 그 자체가 도전이고 반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천주교는 불교나 무속과 달리/ 배후에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는 막강한 현실 권력이 있었지요. 단순히 기술적 우위만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서양 무력의 실체는 나중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860년 중국을 순식간에 쓰러트린 서양의 무력을 보고 조선 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이 병인박해 같은 대박해, 대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과 견주어 볼 때, 박해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135-144쪽 편집) 조선시대 신앙선조들은 도적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이유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선조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문도, 명예도, 재산도, 건강도, 목숨마저도! 하지만 그들은 그날 이후 불멸의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한없는 기쁨 속에서, 영원히!

 

5. 20148, 서울 광화문 앞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가톨릭신자 수 십 만 명이 모였었는데, 왜 하필 광화문 앞에서 시복식을 열었을까요? 여의도 광장이나 한강 공원에서 모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신자들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광화문 일대는 조선시대 육조가 배치되어 있던 곳입니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의금부와 포도청이 있던 자리로서/ 신앙 선조들은 그곳으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일명/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곳에서/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죠. 교회는 치욕의 사건을 씻어줄 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게 끝내 신앙이 승리한다!”는 걸 선포하고자 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의 장소가 불과 150년 만에 영광의 자리로 승화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에서 십자가라는 단어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멍에도 아니고, ‘도 아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예수님 시대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을 겁니다. 멍에나 짐을 지고 가는 것이라면 장사꾼이나 농부이겠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죄인 중의 죄인 곧 사형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날마다 사형 틀을 메고 가며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니!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야곱의 우물 179월호, 108~110쪽 편집)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형수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죽음도, 고통도, 슬픔도, 가난도 빼앗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선조들은 그 세계를/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진정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조선(세상)을 훔친 도적들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