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사무엘기 4장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싸워 크게 패했습니다. 장정이 4천 명 가량 죽었다고 했으니 엄청난 패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필승의 신념으로 실로에서 계약의 궤를 모셔옵니다. 그 궤는 십계명을 모셔둔 상자로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궤였습니다. 실수로라도 그 궤를 만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만큼 하느님의 현존을 강력하게 품고 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 궤를 모신 이스라엘 진영은 의기양양해져서 다시 한 번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보명만 삼만 명이나 죽을 정도로 참담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궤를 모시고 온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약의 궤만 모셔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 궤에 주님의 현존이 머물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죽은 신을 섬겼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 진영에 가져갔지만, 그날부터 재앙이 끊이지 않아 결국 그 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고 맙니다. 그만큼 그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력하게 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먼저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프니하스의 행실을 살펴봅니다. 그들은 사제의 아들로서 경건하게 하느님을 섬긴 게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없고 못 된 짓을 골라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들에 대한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의 궤가 창출한 영광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영광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되었는지 망각했습니다. 광야를 거닐던 모세와 히브리인들이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계약의 궤를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을 때 그 결과가 승리로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의탁하지는 않고 계약의 궤 그 자체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복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은 승리라는 결과가 도출된 과정은 생략하고 그 결과만을 바랐던 셈이죠. 이런 믿음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마르코복음 1장에 나오는 나병환자를 바라봅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고를 무시한 채 치유의 기쁨에 도취되어 자신의 치유를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행위가 뭐 그리 큰 잘못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행위로 인해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활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서 그에게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그분께 되돌아온 것은 바깥 외딴 곳에 머무는 소외됨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게 해 주신 그분의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기 4장과 마르코복음 1장 말씀을 통해 묵상해 볼 수 있는 것은, 내 입장과 내 원의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의 청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청원이었는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