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씨앗을 뿌려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지만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경로를 거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 나라를 건설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악함과 실수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의 악행보다도 더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주도권 앞에 주눅들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방향을 잘못 잡고 실수할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확장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으로도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사람들이 다치고, 광신도(狂信徒)들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들, 세상의 고통과 악함도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뜻으로 볼 수 있느냐?’하는 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처형도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고통과 세상의 악행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은 처음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010절을 보면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의지적인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지적인 뜻은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 앞에 의문에 붙여집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죽음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 하느님의 도움이 개입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고놈 참 고시다며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상황에서 최대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느냐?”고 찾을 때, 그때 찾는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상황적인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다가온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궁극적인뜻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사악함과 죄,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확장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나라의 건설은 조금 더 앞당겨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네 삶이 힘겨워 과연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점이 들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믿고 용기를 냅시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마르 4,26-28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