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어떤 의미일까요?... 세 가지 차원에서 묵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치유입니다. 죽염을 만든 인산 선생은 평생 초가삼간에 살면서 무료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환자가 그분 집 마당에 들어서기만 해도 막힌 기가 뚫려 병이 낫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선하고 강한 기운이 그분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인산 선생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예수님께는 더 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실질적으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환자는 모두 병 고침 받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는, 질병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로 인해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살펴본 구원에 대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좀 더 가지려 하고, 좀 더 높아지려 하며, 좀 더 강해지고 싶고, 조금 더 똑똑해지고 싶고, 조금 더 특별해지고 싶어 합니다.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욕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죠? 하느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명하셨을까요? 물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초월 본능에 의해서 우리의 한계성을 스스로 넘어서고자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이런 몸짓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사회가 만들어낸 당위(當爲)를 우리 스스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인정받으려고, 살아남으려고, 두려워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버림받는다. 그렇게 하면 이용당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목소리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강해지려, 좀 더 가지려, 좀 더 똑똑해지려, 좀 더 특별해지려고 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는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내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내 모습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내 모습인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누가 너 더러 벌거벗었다고 하더냐? 그것이 창피한 것이라고, 무화과 잎으로 가려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냐?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너는 부끄러움을, 수치심을 전혀 몰랐었는데...”

 

우리는 무화과 잎으로 가린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이루어진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면을 쓰고 만나는 것이고, 그 상태로는 참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랑할 땐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성부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서 가난한 영혼을, 나약한 영혼을, 강박증(혹은 영적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는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