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영원한 존재만이 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인 하느님이 줄 수 있는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주겠다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곧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무한한 자유를 갈구하지만 어딘가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에 매이게 되고 그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데, 그때 그 밖의 다른 것은 전부 배경이 됩니다. 부모 손잡고 수도원에 견학 온 꼬마가 부모 손잡고 온 다른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장난칠 때, 그 아이의 관심사는 온통 그 여자 아이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도 수도원도 그 꼬마에게는 모두 배경입니다.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그 꼬마에게는 배경일 뿐이죠.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최고의 것이 아닌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사람의 초월역량은 축소됩니다. 얼마든지 더 뻗어나갈 수 있는데 작은 것에 머무르게 되고 그 세계 속에서 아등바등 살게 됩니다. 미국의 소년원에 수감된 한 소년이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친 생활 속에서도 소년에게 기쁨을 줘 어디든 품고 다녔던 그것은 다름 아닌 생쥐 한 마리였습니다. 그 소년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생쥐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 소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연상케 합니다.

 

사람은 최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한 그보다 못한 것에 매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겐 최고의 가치 및 하느님에 대한 배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빵의 이적을 경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배를 타고, 산을 건너, 그분이 어디에 있든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 모습은 흡사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고 그 사람에게 가족을 부양할 책임마저 생겼다면 그의 욕구는 더욱 더 처절해지겠지만, 그것이 공동선을 위협하거나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본연의 생존욕구를 왜곡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군중에게, 곧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소신을 버리고 모순적인 상황과 타협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사람의 생존욕구를 실현하는 길이고, 자유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비결인데...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요한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