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신앙심과 종교심은 다릅니다.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만, 종교심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을 아시는지요?... 종교심은 자신이 좋아 신을 찾아나서는 모습입니다. 혹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짓눌려 두려움 때문에 그 대상을 흠숭하는 상태입니다. 동기도 목표도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신앙의 동기와 목표가 하느님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시작도 마침도 내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신앙이 자라려면 먼저 자신을 초대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 그 초대에 응답하기 위한 자신의 생각과 삶을 포기하는 태도가 따라야 합니다.

 

종교심과 신앙심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내용과 결과는 현격히 다릅니다. 비록 종교심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신앙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교심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동기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 년 사는 것인지요? 아무런 고통 없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는 것입니까? 일종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것이라면, 그것은 초원에 살고 있는 사자의 삶이 아닌지요. 그런 것쯤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 때 주어지는 것 아닌지요. 굳이 계명생활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구원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서로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가 된 하느님, 뚜렷이 구별되지만 나뉨 없이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대상이 있어야 하죠. 그 누구도 자기 혼자서 사랑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며 사랑의 원천으로서 그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창조입니다. 사랑의 특성 상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 안으로 세상 만물을 끌어들이시는데,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됨이 곧 구원입니다.

 

그런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는 다른 존재자와 다른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빛을 만들 때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죠? 말씀으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죠. 하지만 사람을 만들 땐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말씀만 하셔도 될 텐데, 굳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당신과 인격적인 교류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할까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화가 잘 됩니까?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어도 남녀가 사용하는 말이 달라 대화가 잘 안 됩니다. 같은 사람끼리도 대화가 잘 안 되는데, 창조주와 피조물이 대화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바퀴벌레와 대화 해 보셨습니까? 바퀴벌레와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지요? 생쥐와 사랑의 대화가 가능한지요? 같은 피조물끼리도 대화가 안 됩니다. 하물며 신격을 지닌 존재와 인격을 지닌 존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 예수님으로 인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으로서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닌 인성으로 사람과의 교류가 가능하고, 그분이 지닌 신성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됨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래서 그리도인들은 모든 기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명의 인격이 신격을 만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특성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지복직관의 영광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한 번도 꿈꿔보지 못했던 창조주가 누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계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저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기 위한 수단이나,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결론으로 선택한 삶이 아닙니다. 교황 베네딕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 삶의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람 한 사건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께서 사셨던 것처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나왔습니다.”(사도 5,41) 이 사람들, 미친 겁니까? 어떻게 모욕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마련한 영광을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면서도 악을 행한 듯 벌을 받고, 벌을 받으면서도 상을 받은 듯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구원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람들, 곧 빵을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은 똑같이 열렬히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던 구원의 내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모두 흩어져 버렸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더욱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더욱 더 용감해졌고, 더욱 더 기쁘게 지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종교인입니까?...

 

주님, 저희는 저희가 무엇을 갈구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당신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저희를 위해 마련해 주신 당신의 선물이 무엇인지 저희들이 분명히 깨달아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에 의연하게 하시고, 힘겨움 한가운데서도 항상 기쁨과 희망 간직하며, 부족한 나 자신과 결함 많은 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그 결과 당신 품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지금 이 자리에서 미리 맛봐 더욱 큰 환호성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