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1896년 늦여름, 어느 가혹한 하룻밤이 톨스토이의 삶의 향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그는 가장 원기 왕성한 때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7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마침내 그는 대작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건장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두었으며, 유명세와 부()도 누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한 거대한 작품을 완성한 데서 오는 깊은 만족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새로 산 땅도 볼 겸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떠난 지 사흘쯤 지났을까요? 톨스토이는 지친 가운데서도 휴일의 기분에 흠뻑 취한 채 아르자마스라 불리는 낯선 곳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는 마을 여관에 방 하나를 얻어 저녁을 먹고는 침대로 들어가 곧장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다음 날 새벽 2시경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스스로 이해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을 만큼의 큰 공포에 떨었습니다. 어둠 속을 응시한 채 그는 거의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진정시키려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해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참 우습군. 도대체 뭐가 그리 두렵다는 거야?”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한 음성이 들여왔습니다.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여기 있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이 소름끼치는 대답을 듣고 나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삶에는 죽음밖에 아무것도 없다.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그는 신앙심이 그리 돈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기도문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고 했을 때, 무서운 죽음의 이미지들이 다가와 그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그의 모든 신체 기관 곳곳으로 스며들어 그를 허무의 나락으로 잡아끌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그토록 긴 밤을 보내는 가운데 톨스토이는 갑자기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방을 뛰쳐나왔습니다. 여관의 긴 복도를 이리저리 오가던 중에 그는 잠자는 숙객들이 운율에 맞춰 내는 코 고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엄습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 그들이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들이마시는 숨 하나하나가 마지막 숨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다른 이들은 자신처럼 나약한 삶의 현실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톨스토이는 새벽이 오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과의 대면 후 그는 온전히 압도되어, 토지를 매입하려 했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41년을 더 살았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아르자마스에서 자신을 넘어뜨렸던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인간은 두 가지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죽음에 반응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입니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의 내다보면서 공포에 떨든지, 아니면 그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은 대응을 회피하는 일종의 방어 기제이고, 부정할수록 두려움은 억눌려 표면 아래에서 더욱 심각하게 들끓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곧 방금 깎은 풀에서 올라오는 향기,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빗소리, 좋은 책이나 영화에서 오는 감동의 전율, 사랑하는 이와의 포옹 등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해 최후의 순간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회피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또한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볼 기회, 화해하고 이별할 기회, 다른 어느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체험으로서 내 마음과 정신과 몸을 개방할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죽음의 가치를 온전히 인식하고 맞이할 때, 그것은 전대미문의 악몽이라기보다 일종의 완결과 충만을 향한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지난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을 임종 때에야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죽음에 대해 함구하려는 오늘날의 풍조와 달리 우리 선조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은 좋은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죽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단지 착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위한 삶의 기술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의 죽는 방식은 우리의 사는 방식에 아주 많이 의존하고 그것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준비 방식은 우리를 잘 살게 이끌어 주는 덕들과 인품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삶은 마치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옷처럼 연속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덕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덕망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에 임하는지를 관찰하고 배우는 데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의 삶을 보면서 죽는 기술, 다시 말해 충만한 삶의 기술을 익히는 계기를 마련해 봅시다.

 

- 케리 월터스, 아름답게 사는 기술, p.10-27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