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명령하신 다음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하신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네 번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암시하신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여러 번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유다의 회심을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님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열두 제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자기를 지목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회개하기보다는 마음을 더욱 더 모질게 먹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열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된 것은 시편 41,10절에 나오는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란 성경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유다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유다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 선택된 도구일 뿐이라고. 이런 생각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유다로 하여금 끔찍한 죄를 범하도록 이미 운명지어 놓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도록 제자로 불렀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유다의 배반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이었다. 유다는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의 생명의 법을 거스르는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마태 27,3-4) 주님께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거나, 하느님께서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도록 처음부터 운명지어 놓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빵을 적혀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13,26) 하고 말씀하시면서,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신다. 예수님이 그에게 빵을 적셔주신 것은 유다에게 사랑과 우정의 환대를 표현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빵만 받아먹었을 뿐 예수님의 우정의 환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네 차례 말씀으로만 유다가 회개하도록 초대하신 것이 아니다.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그의 발을 씻어주셨고, 또 성체성사를 제정하면서 모든 인간의 죄를 씻으시는 당신의 살과 피를 그에게도 주셨다.(마르 14,22-25)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거듭된 호의를 차버리면서 예수님을 배반한다. 그리하여 구원 사업의 도구로 불림 받았던 자가 이제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변질된다.

 

유다는 여러 번에 걸쳐 제공된 회개의 기회를 물리침으로써 역사가 가장 꺼리는 오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다의 배반 이후 사람들은 유다란 이름을 기피하게 되었다. 본래 유다란 이름은 매우 영예로운 이름이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가장 영예로운 지파가 유다 지파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독립투사는 유다 마카베오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1세기 유다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이름이 유다와 예수였다. 하지만 2세기부터 유다란 이름은 서서히 사용되지 않다가, 그리스도교가 국교화가 된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유다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아직도 법으로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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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주어지는 회심의 기회!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느님은 노아에게만 방주를 만들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너무 했다고 말한다. 인류를 심판하실 계획이었다면 사전에 여러 차례 경고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느님은 정말로 경고하지 않으셨을까?...

 

노아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만든 배는 길이만 15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배였다. 2015년 봄, 할리우두에서는 영화 노아를 만들어 개봉했다. 방주를 실제로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1200평의 6층 건물 규모라고 한다. 제작진은 방주를 창세기 6장에 적힌 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노아에서 방주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5개월이었다. 최고의 장인들과 현대 장비와 기술을 투입했는데도 5개월이나 걸려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노아가 혼자서 원시적인 장비와 기술로 방주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적어도 몇 년이 걸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몇 년 동안 매일같이 노아가 배를 만들며 내는 망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망치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경고 메시지였다. 이 경고가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오히려 노아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비도 오지 않고 바다도 없는 메마른 땅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든다고 밤낮 없이 뚝딱거리는 노아를 비방하고 욕을 해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몰살당했다.

 

사랑받는 제자와 유다는 둘 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다.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 우편에,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는 예수님 왼편에. 그런데 두 사람의 내적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마음속에 예수님과의 일치를 누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마음속에 비열한 배반을 꾸미고 있었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는 한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청했던 가장 높은 자리다. 특별히 유다가 앉은 자리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 13,27)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사탄이 유다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는 말이다. 그전까지는 사탄이 밖에서 유다를 유혹했는데, 이제부터는 그를 완전히 점령해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다가 아닌 다른 제자에게 빵조각을 주고, 그 제자가 그대로 받아먹었다면 사탄이 그 제자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어둠의 세력이 한 영혼을 완전히 소유해 버리는 과정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을 갖고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귀신들림이란 당사자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반복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점진적인 과정이다.”(Scott Peck)

 

예수님이 유다에게 빵조각을 준 것은 그를 회심시키고자 하시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사랑과 우정의 호소였다. 그런데 유다는 그 빵조각만 받아먹었을 뿐 예수님의 환대는 무시해버렸다. 그 순간 비로소 사탄은 유다의 영혼 안에 들어가 그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사탄이 한 영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찾는 취약 부분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죄스런 성향과 약한 세계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무질서한 애착, 어두운 성향 등을 이용해서 그 사람을 유혹한다. 사탄은 유다의 취약한 부분을 이용해서 그를 파멸사업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에게도 사탄이 자기 도구로 삼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그것을 없애고, 극복하고, 변화해야 한다.

 

한 인간 안에는 천사와 악마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마음 한편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돌보아 주시면서 우리가 생명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고, 사탄은 우리의 취약한 부분들을 건드리면서 육신의 욕망과 세속적 이해를 따라가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인간은 조각하기 위한 돌이다. 여기에 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것도 악마의 모습을 조각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다.”(에드먼드 스펜서)

 

 

- 송봉모,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1, 70~102쪽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