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만족해하는지 살펴봅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물질 이외의 것도 있습니다. 생명체가 그것입니다. ‘생명은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물질은 아니죠. 생명체에게는 물질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는데, 중세철학에서는 이것을 ’(魂)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혼이라고 해도 다 같은 혼이 아니라, 개별 존재자에 따라 그 혼의 성격이 다릅니다. 식물은 살아 있다고 해서 생혼이라고 불렀고, 동물은 느끼고 움직인다고 해서 각혼이라고 불렀으며, 사람은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영혼이라 불렀습니다.

 

식물은 생장지심이 있어 실컷 먹고 살게 해 주면 흡족해합니다. 동물은 지각지심이 있어 실컷 먹고 뛰놀게 해 주면 흡족해하고요. 사람은 의리지심’(義理之心)이 있어 의로움을 갖추고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해야 만족해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리곧 의로움과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동물을 가둬 놓고 실컷 먹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식물의 행복조건인 실컷 먹고 사는 것을 동물에게 제공하고 그 이상의 것이 제공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가둬 놓고 음식만 제공하면 동물은 괴로워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의 행복조건인 실컷 먹고 노는 것만 제공하고 그 이상의 것이 제공되지 않으면, 사람은 삶의 의미를 못 찾겠다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의리지심 곧 영혼이 있기 때문이죠.

 

식물, 동물,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다른 것은 그 존재자들의 기대치와 용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컷 먹고 노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결핍을 느낀 사람은 그때부터 뭔가를 추구하는데,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크게 세 가지 차원 곧 Having의 영역, Doing의 영역, 그리고 Being의 영역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돈을 벌고, 여행을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심미적인 삶입니다. 가지고 누리며 쟁취하는 영역, Having의 영역이죠. 그런데 심미적인 삶은 머지않아 실증을 느끼게 합니다. 실증을 느낀 사람은 그때부터 의미 있는 일을 시도합니다. 업적을 남기려고 하고 누군가를 도우며 윤리도덕적인 삶을 시도하죠. 이것은 Doing의 영역입니다.

 

윤리도덕적인 삶은 머지않아 이런 저런 한계에 부딪힙니다. 잘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개인적 사회적 모순과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되는데, 사람은 놀랍게도 그 한계 앞에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한계를 초월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Being의 영역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만족해하는 단계. 이런 것을 신앙인의 삶이라고 부르죠.

 

사람은 드디어 무엇인가를 쟁취하려고도 하지 않고 의미 있는 일을 시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나약하고 모순된 자기 모습 안에서 완전한 무엇을 발견한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 담긴 완전함을 보는 것이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완전한 것, 올바른 것, 영원한 것,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결코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여야지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만족함은 내 안에도 없고 다른 사람 안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 안에만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만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죠. 따라서 하느님을 찾은 사람은 도처에서 만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해하는 단계, 혹은 매사에 감사드리는 삶입니다.(1테살 5,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