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세상은 기쁨으로 술렁거립니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한 해 동안 나누지 못했던 근황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파고들더군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임을 알고 있을까? 크리스마스를 기뻐해야 할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즐거워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진다면 그것은 너무나 유아스럽지 않은가. 그것이 아니라면, 신앙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탄생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에는 그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지요. 석가모니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를 열고 태어날 때, 손가락 하나를 위로 치켜든 채 동서남북 방향으로 일곱 발자국씩 아장아장 뛰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고 합니다. 그것은 옆구리가 시린 고통의 문제는 하늘 위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직 본인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설화는 평생토록 고통의 문제와 씨름했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예수에게도 탄생 설화가 있지요. 그는 태어나자마자 말구유에 눕혀 졌는데, 그것이 인류를 위한 하늘의 표징(루카 2,12)이라고 했습니다. 말구유는 말 밥통입니다. 밥통에는 밥이 들어 있습니다. 밥통에 아기 예수가 눕혀져 있으니, 그가 곧 인류를 위한 밥이란 뜻입니다. 살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하듯이 인류가 살기 위해서는 그를 먹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일찍이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고, 최후만찬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으라고 내어줬으며, 속죄제물처럼 끝내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처형당함으로 인해서 인류는 죄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 인류를 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었던 것입니다. 이 설화 또한 인류를 살리기 위한 예수의 생애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자렛 예수를 세계의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인정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밝혔습니다. “나는 ○○이다는 형식은 신적인 정체성을 밝힐 때 사용하는 형식인데, 나자렛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마다 이 형식을 활용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였습니다. 생명의 빵은 잘 먹히도록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류를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강해야만 살아남는다고 믿습니다. 많이 가져야만 살아남는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하느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그분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고, 가난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강함도 아니요 부유함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올해도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인류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기뻐하는 축제가 크리스마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가난하게, ‘에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어둠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입니다. 인류의 슬픔과 고통, 나약함과 모순 등을 함께 겪기 위해서! 왜 굳이 그렇게 인류의 어둠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행위는 사랑의 몸짓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올해도 변함없이 인류를 찾아오십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강함도 부유함도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이라는 진실을 증언하시기 위해서! 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지금-여기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