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코로나-19 사태로 불안하신 분들은 이전 글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1. 제가 모처럼 포카 게임을 했습니다. 한 번은 초반에 8포카를 잡았는데, 그때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남이야 뭐를 들고 있든 말든, 무엇이라고 하든 말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투자하면 투자하는 만큼 다 나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판돈이 커져갈수록 흐뭇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돈 전부를 때려 넣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에이스 포카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그 당혹감, 얼마나 놀랬던지... 그때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 꿈 이야기입니다.

 

이 꿈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내가 높다고 생각할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 내가 힘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고, 또 그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죠. 사실 우리의 눈은 너무 멀어도 못보고, 너무 가까워도 못보고, 빛이 너무 밝아도 못보고, 너무 어두워도 못 보는 미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꼭 눈으로 봐야지만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우리는 흔히 자신이 관심 갖고 있는 분야만 보인다.’고 합니다. 미용사는 사람들의 머리모양만 쳐다보고, 신발장수는 사람들의 신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취미생활에 빠진 사람은, 예를 들어 바둑이나 당구에 빠진 사람들은 사람들이 바둑알이나 당구공처럼 보인다고 하지요.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바라보는 시야도 무척 좁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와는 달리 모든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 뜬 장님이 아닐는지요?...

 

2.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참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 조건 없는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 힘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 속에서만 성장해서 정글의 법칙에 길들여진 사람. 사랑의 논리를 얘기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하느님께서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착한 일을 해서 능력이 있어서 예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들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다.’는 전제하에 오늘 복음을 읽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앞 못 보는 우리에게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또박또박 성실히 같은 단어를 되풀이해 주는 엄마처럼, 아이가 글을 쓸 때 손을 잡고 친절히 천천히 따라 쓰는 엄마처럼, 그렇게 친절히 우리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당신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눈뜬 사람은 진실을 얘기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었소.’ 하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찾아가서 당신 아들 맞느냐?’라고 묻고, 눈뜬 사람에게 경위를 다시 묻고, 결국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댑니다.

 

반면에 눈뜬 사람은 분명한 식견을 갖게 되었죠. “나는 전반적인 사건은 잘 모릅니다. 세상살이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화를 내며 그를 공동체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하지만 버림받은 그 사람은 그때 예수님을 만났고, 참다운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왔습니다. 구분 지으러 왔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는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9,39 편집) 만약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교만과 어둠 속에 계속 머문다면, 그 사람은 눈먼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에 스스로 눈먼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3.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자로서 행동하셨습니다. 태생소경도 예수님께 파견 받았고, 파견 받은 자로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에게 빛을 주는 것, 곧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그리스도께 다가가서 치유 받고 눈을 떠서, 사람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합시다. 우리는 실로암에서 얼굴을 씻은 사람들, 곧 파견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한 예화를 한 개 준비했습니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교황님도 히틀러에게 학살을 중단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지 못하셨을 때,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가는 데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막시 밀리안 꼴베 신부님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하느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죄수 한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받아들인 성모기사회의 창시자인 꼴베 신부님을 통해서 내가 너희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 받고 있노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장님이 아닌지요?...

 

하느님은 코로나-19사태를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외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또한 눈먼 모습이 아닌지요?...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바리사이들에게 했던 말씀이 오늘 저에게 크게 다가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뜨도록 파견된 자’,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와서 눈을 씻고 눈을 뜨도록 도와줍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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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송봉모 신부님의 글을 첨부했습니다. 이어지는 글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