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지난 주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비참하게 살던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 안에서 샘솟는 물을 마시게 한 내용이었죠?... 자포자기했던 그녀가, 마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던 그녀가 스스로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도 평생 빌어먹던 사람이었는데,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사이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며 예수님의 신원을 선포하는 사도로 변신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합니다. 우리도 변화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선포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1. 구약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탈출 4,11; 시편 146,8) 구약성경에는 언젠가 메시아가 오면 눈먼 이들을 고쳐줄 것이란 예언은 있었습니다.(이사 29,18; 35,5; 42,7)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유독 예수님께서 눈먼 이들을 많이 치유해 주십니다. 무슨 의도였을까요?...

 

그렇지요. 당신이 바로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그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 사건은 오늘 복음 바로 앞에 나오는 성경 본문,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라고 선언하신 그 선언이 사실임을 행동으로 입증한 사건입니다.

 

2. 오늘 선포된 복음의 첫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9,1) 여기에서 눈먼 사람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아네르(aner)를 쓰지 않고, ‘인류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안트로포스(anthropos)를 쓰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을 언급하며, 이 소경은 인류를 대표하여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으로 눈이 먼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눈먼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은 언제 영으로 눈을 뜰까요?...

 

세례성사를 통해서입니다. 로마 카타콤에 태생 소경과 세례예식에 관련된 그림이 일곱 개나 되는 것을 보면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이 태생 소경을 고치신 기적을 세례성사와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먼 사람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듯 영으로 눈이 먼 사람들도 인생의 참뜻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영으로 눈이 멀었기에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의 참된 사랑과 평화, 기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눈먼 이를 보고 다가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버려진 상태에 있는 영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영혼, 헤매는 영혼에게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 이것이 진정 기쁜 소식입니다.

 

3.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9,2) 제자들은 태생 소경에게 연민을 느끼기보다 누구의 죄 때문에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9,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 한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로 만들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이 옳은 것이라면, 우리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계획된 일이라는 말이 됩니다. 쓰나미가 덮치고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한 순간에 죽는 것도, 비행기 사고로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기근으로 수많은 어린이가 아사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 됩니다. 때로는 인간의 사악함과 탐욕으로 인한 고통조차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느님은 몰인정하기 짝이 없는 분이시죠. 마치 자신의 뛰어난 기량을 증명하려고 환자의 병이 깊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잔인한 의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복음서에서 고통 받는 인간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유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고통받는 병자들을 가엾이 여겼다에 사용된 단어는 그리스어 스플란크니조마이(splangchnijomai)로서 애간장이 끊어지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듯 아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기적은 병자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대답은 어떻게 된 일까요?...

 

이것은 어처구니없게도 16세기에 시행된 인쇄업자의 잘못된 절 구분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장 표기는 13세기부터, 신약성경 절 구분은 1551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Roberto Etienne)이 절을 나누면서 점을 잘못 찍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시간에 쫓기던 에티엔은 마차 여행을 하면서도 절 표시를 했는데, 간혹 말이 뛰어 마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의도한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점을 찍게 되었다고 하지요.

 

제대로 절을 구분하면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게 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여기에서 완전히 마침표를 찍고, 그 다음 다른 내용이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기 위하여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라고요.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사이에 점이 찍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문장 사이에 점이 없어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기 위하여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는 문장이 되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에 대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지만, 고통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에게 고통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치워버리러 오신 것도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셨습니다.”(폴 클로델)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습니다.>(9,6-7) 교부들은 진흙을 사용해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행위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창세기 27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셨다와 예수님의 행위를 연결한 것이죠.

 

예수님이 태생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준 곳은 성전 입구이거나 그 근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550여 미터 내려가야 있는 못입니다. 눈먼 사람이 혼자 내려가기에는 힘든 길이죠. 분명히 그는 여러 번 넘어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두 눈에 진흙을 붙이고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에게 힘든 걸음을 걷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치유 받는 자의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먼저 다가가 생명을 주고자 하시지만, 상대방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태생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5. 이후부터 35절까지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치유 받은 사람이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을 옹호하고 그분의 신성을 증언합니다. 그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계속 심문을 받으면서 점차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로 변화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이라고 고백했지만, ‘예언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그리고 주님의 순서로 고백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이해가 깊어진 것은 바리사이들과 대결을 거친 덕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 신앙이 자란다.’는 사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놀랍게도 태생 소경은 네 복음서를 통틀어 박해와 위협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용감하게 고백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사람의 신앙과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쩌다 예수님이란 분을 선택했다거나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권유로 믿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점점 예수님이 참으로 특별한 분임을 알게 되죠. 불쌍한 인간들에게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분,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분,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의 죄를 치워버리고자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겪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체험을 하면서 깊이 깨닫는 것이죠. 마침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라고요! (필리 1,21.20 편집)

 

신앙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신앙이 계속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믿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믿는다는 동사만 거의 100번 사용합니다. 신앙행위는 세례 때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첫 신앙고백 이후 계속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신앙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단지 익숙해질 뿐인데!...

 

시간이 흘러 교회생활이나 전례에 익숙해지는 것과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그것은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영어에서 제자는 disciple이고, 훈련은 discipline이죠?... 어근이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따르면서 만나는 수많은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6. 이런 측면에서 태생 소경이 유다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날이 언제였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생 소경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바로 그 날 유다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했습니다. 회당에서 영구적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민족공동체에서 추방됨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추방된다는 뜻이며, 회당에서 추방되면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이 유다 지도자들 앞에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다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를 찾아오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35배 크기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어딘가에서 그를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뜰을 거닐면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와 던진 예수님의 질문이 중요합니다. 무엇이었죠?...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였습니다. ‘네가 가족, 친지, 동포로부터 버림받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 이제 겨우 눈을 떴는데, 성전 내부도 보지 못하고 쫓겨났으니 얼마나 억울하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태생 소경의 구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짜고짜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고 묻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태생 소경 또한 지체 없이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며 땅에 엎드려 경배를 드립니다.

 

땅에 엎드린 태생 소경의 모습은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크리소스토모 교부가 지적한 것처럼, 주님께 치유 받은 사람들 중에서 이 사람처럼 주님께 엎드려 경배 드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처럼 주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경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지요?...

 

7. 드디어 오늘 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를 다룰 때가 되었네요. 그것은 정말 눈먼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9,2.41)

 

예수님은 9장 앞부분과 9장 마지막 부분에 눈먼 사람을 반복해 언급하며 당시 유다인들은 물론이요 오늘날 우리의 이해까지 뒤집어 놓으십니다. ‘는 율법이나 윤리 차원에서 지적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심판을 받았죠?...

 

당시 유다인들처럼 우리도 육으로 볼 수 없는 이들을 눈먼 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영으로 볼 수 없을 때 진정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태생 소경처럼 눈이 멀었던 사람이라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 영적 시력을 선물로 받는 사람과 바리사이들처럼 스스로 본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여 영으로 눈 뜬 소경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이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여 죄의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헤맬 것입니다.

 

<한 마을에 새로 이사 온 가정이 있었습니다. 젊은 엄마 혼자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었는데, 맏이인 딸은 완전히 앞을 보지 못했고, 둘째인 아들은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젊은 엄마는 아이들에게 학교 가는 길을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얘야, 여기는 철조망이 있단다. 조심해야 해. 여기는 길이 굽어져 있단다. 여기는 건널목이란다. 조심하렴.” 얼마 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렴풋이나마 앞을 볼 수 있는 아들은, 엄마가 길을 가르쳐 줄 때 조금은 소홀하게 들었고, 완전히 앞을 못 보는 딸은 엄마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두 아이가 처음 얼마 동안은 아무런 사고 없이 학교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짙은 안개가 낀 날이었습니다. 약간 볼 수 있는 아들은 안개 때문에 몇 걸음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옷이 찢어지고,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면서 비명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누나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갔습니다. 한편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누나는 안개가 짙게 끼든 날이 밝든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은 감았지만, 앞길은 훤히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주님을 믿고 그분께 앞길을 내맡기며 평안하게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강론도 건성으로 듣고, 성경 말씀도 대충 훑어봅니다. 그러다 폭풍우가 치고 안개가 내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헤매다 부딪치거나 비명을 지르고 진흙탕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지?’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돈과 건강, 관계 회복에만 집중하느라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힘과 쾌락, 세상적인 것에 집중하느라 영적인 눈이 흐려진 것은 아닌지요?...(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 87-161쪽 편집)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