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발생한 가장 큰 변화

 

최근에 어느 분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빌 게이츠의 아름다운 성찰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빌 게이츠 씨가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언급한 것 외에도 이런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공동체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이 가톨릭교회의 미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현재 아마존 지역에서는 사제가 없어서 교우들이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성찬례 없이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나머지 교회에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성찬례를 이끄는 이들은 대부분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분들이죠. 코로나-19 사태로 강요된 일시적 성찬례 단식을 통해 우리는 장차 닥칠 성찬례의 빈곤에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창의적인 해답을 함께 찾아 나선다면, 단식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욱 건강하게 하듯이 공동체 미사를 포기해야 하는 지금 상황도 결과적으로 우리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윌리엄 그림 신부, 2020.3.22. 가톨릭신문 8쪽 편집)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이끄심에 주목해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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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분은 오늘 복음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어떤 벅차오름이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강한 반발심이나 의구심이 솟구칩니까?... 이보다 더 큰 기적, 혹은 더 큰 스캔들은 있을 수 없는데,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이 사건 앞에서 그저 덤덤하다면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오늘 1독서 말씀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2.13)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끌어올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이렇게 예수님은 명백히 당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밝히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르타가 했던 헛된 고백이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라고요.

 

이 신앙고백은 언뜻 보면 가장 완전한 신앙고백처럼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라는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엉뚱한 고백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라자로가 묻힌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고 했을 때,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예수님을 만류하는 그녀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르타처럼 알맹이 없는 허울뿐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앙고백의 의미는 오늘 주보 3면을 참조하세요.)

 

2. 오늘 라자로는 소생했습니다. 그는 부활한 게 아니라, 소생했습니다. ‘소생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부활은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입니다. 소생한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죽지만, 부활한 사람은 영원히 죽음에서 해방됩니다. 라자로의 소생 기적은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일곱 가지 표징 중에서 마지막 표징입니다. 첫째 기적, 카나 혼인잔치의 표징이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었다면, 마지막 기적인 라자로의 소생은 그 새로운 시대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첫 번째 표징이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드러내는 결혼식 자리에서 이뤄졌다면, 마지막 표징은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무덤에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3. 예수님은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중한 상태인데, 어떻게 지체할 수 있었을까요?... 라자로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 라자로가 중태에 빠지자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기별꾼을 보냈습니다. 기별꾼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자로는 죽었고, 유다인의 풍습에 따라 라자로는 그날 무덤에 묻혔습니다. 기후 특성상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죽으면 시신은 8시간 만에 무덤에 안장됩니다.

 

기별꾼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 예수님은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넷째 날, 예수님이 하룻길을 걸어와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그날은 라자로가 죽은 지 넷째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초월적 지식을 갖춘 분이시기에 라자로의 중병 소식을 들었을 때 서둘러 베타니아로 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굳이 이틀을 더 지체하셨을까요?...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3일 동안 시신 주위를 맴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고, 3일째 되는 날 무덤 문을 열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는지 살펴봤습니다. 사람이 죽어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은 멀리 떠나가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흘이 되면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미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지체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토모 교부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틀이나 지체하신 것은 라자로가 혼수상태에 있거나 기절해 있을 때 예수님이 살려낸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의도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1,4) 라자로가 중병에 걸려 모진 고통을 겪다 죽은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비극적인 사건은 일어났지만, 그것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뜻입니다.

 

4. 이때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란 말 대신에 잠들었다란 말을 선호하셨는데, 그것은 죽음이 더 이상 영원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발생한 가장 큰 변화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통과하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6)는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다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무슨 말씀일까요?...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는 육체적 죽음 이후 세상 종말에 누리게 될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는 현재 누리는 영적 생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을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비록 육체적으로 죽겠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은 지금은 물론이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6)

 

마르타가 믿고 있던 부활은 세상 종말에 이뤄질 육체적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지금-여기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신 겁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이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그 빛이 주는 따스함과 밝음을 체험하듯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그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가장 위대한 변화는 죽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성서학자 릭)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영원한 생명을 훗날 천당에 가서 누리게 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5. “돌을 치워라.”(11,39)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숨 끊어진 사람을 다시 살려낼 권능을 지닌 분께서 돌 하나 굴리는 데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을까요?... 주님께서 돌을 치워라.”고 하신 것은 기적은 주님의 능력과 우리의 응답이 함께할 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꾼들의 순종을 통해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사건에서도 태생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소생 기적도 사람들의 응답이 함께할 때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보여준 순종에 맞갖게 기적을 일으키셨고요. 우리도 마땅히 이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당장에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때 우리의 행위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6. 제자들과 둘러선 군중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5장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5,25) 하신 말씀이 진리임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큰 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시자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던 시체가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오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겁니다. 수의를 걸치고 무덤 밖으로 나오는 라자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찬란한 운명을 봅니다. “죽음아,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강하고 두렵다 했으나 너는 그렇지 못하니... 한숨 자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 더 이상 죽음은 없으리라.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존 던)

 

우리도 언젠가 죽어 무덤에 묻히겠지만, 우리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칠 것이고, 라자로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만 멈추어 봅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었을 때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실까요?... 우리가 죄를 짓거나 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돌아와 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 233-303쪽 편집)

 

7. 오늘 1독서로 선포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을 되새겨봅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2.13) 예수님은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끌어올리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 확실히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마지막 표징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11,47-48)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상상할 수 없는 이 놀라운 표징 앞에서 유다인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대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면 당신께 어떤 일이 닥칠지 아셨지만, 그 처절한 고통과 치욕과 두려움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을 안겨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감옥 문이 열렸지만, 그렇지만 감옥이 흔들리고 감옥 문이 열렸다 하더라도, 우리가 감방을 떠나 자유의 빛 속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실제로 풀려난 게 아닙니다.”(도널드 블러쉬) 아직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한 마르타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깁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