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기는 믿음

 

 

올해 사순절에는 안소근 수녀님의 성경 에세이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로 인해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사제서품을 앞둔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순명하겠노라 다짐했던 그 시절! 그 결심은 끝내 제 제의 앞에 ()자를 새기는 것으로 드러났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발생한 가장 큰 변화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분의 강림으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통과하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가장 위대한 변화는 죽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봉헌할 때 발생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 11,25-26 ; 사순5주일 강론 참조)

 

다시 말해, 예수님의 업적 한 가지만 말해 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와 죽음의 사슬에 묶인 인류를 해방시켜 지금-여기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 것입니다. 곧 지금-여기에서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됨!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 자유와 생명 등은 죽음의 사슬을 끊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이요, 하느님과 인격적인 결합을 이룬 자에게 주어진 혜택(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죽음을 이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1차적으로 순명으로 드러납니다. 지금부터 순명으로 죽음을 꺾는 여정을 떠나봅시다. 이번 여정의 길 안내자는 안소근 수녀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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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이사야는 50년에 걸친 바빌론 유배의 끝 무렵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첫 단락에서 제2이사야의 중요한 주제가 미리 소개되죠. 이제 이스라엘의 종살이가 끝났으니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새로운 탈출을 준비하라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한 소리가 외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이사 40,3) 여기에서 광야는 예언자가 말씀을 선포해야 할 대상을 가리킵니다. 그 대상은 비옥한 땅이 아니라 사막 같은 광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여 주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지요.

 

예언자는 바로 그 광야에 주님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아무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모세 시대처럼 다시 한 번 당신 백성을 이끌고 약속하신 땅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냥 현상유지에 머물며 바빌론 땅에서 그대로 남아 있으려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일어나서 그 땅을 떠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땅으로 돌아가라고, “나오너라, 나오너라하고 재촉해야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아직도 그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쳐야 할 광야를 환히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바빌론에 끌려와 5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 온 백성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들에게 바빌론은 절대적인 지배 권력인데, 그 억압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믿는 일은 50년 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믿는 것 못지않게 어려웠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저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2. 다시 오늘의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회개를 권고하고 멸망을 예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이 다 썩었기 때문에 곧 멸망하고 말 거라고 위협하는 게 더 쉬울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 보시기에 소중하다고,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한 조각 이루는 것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광야에 길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숱합니다.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는 말씀을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에 온 삶을 걸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는 믿음이 있을 때에야, 광야에 주님의 길이 나게 할 수 있습니다.(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121~130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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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야에 주님의 길이 나게 할 믿음을 청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은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습니다.”(마르 15,39 편집)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께 내려와 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목숨을 구한다면 메시아로 믿겠다면서... 어쩌면 예수님이 그렇게 당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많은 사람이 당신을 믿게 하는 데 더 쉽고 효과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죽음에게 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피하려 하는 것은 내가 죽음보다 약할 때입니다. 죽음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약해서 죽음에게 진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 앞에서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이라고 하실 만큼 큰 두려움을 느끼셨고, 그래서 그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아버지께 청하셨지만 결국 남김없이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손에서 죽음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예수님은 죽음에 지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 당신 앞에서 힘을 잃게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꺾으셨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푹 숙인 가장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백인대장은 그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봅니다.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바드’kabad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충만히 드러난 자리는, 다름 아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요한 공동체는 십자가 수난에서 하느님의 외아드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요한 1,14) 세상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과거 · 현재 · 미래에 언제나 계속되지만, 그 사랑의 정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에 동참하도록 합시다.>(송봉모,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275. 279쪽 편집)

 

4. 예수님은 그렇게숨을 거두시어 완전하게 되셨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난을 겪음으로써 순종을 배운순교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하려고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배교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배교한다고 말이라도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죽음에게 패배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죽음을 이긴 이들이 되었습니다.

 

순교를 원했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삶을 원하기보다는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영원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열망이 있는지요?...

 

우리는 꼭 오래 살려고 한다기보다는, 실패를 겪지 않으려고 하고 상처를 입지 않으려 하며 피해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고통을 벗어나려 하고 어려움과 위험은 이리저리 피해 다닙니다. 박해시대에 있었던 순교에 대한 열망이라는 그 표현조차 생소합니다. 마치 나는 죽지 않아야 하고 내 삶에는 죽음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죽음을 꺾는 승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201~208쪽 편집)

 

5. 백인대장은 그분의 죽음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렇게숨을 거두실 수 있는 분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느님의 아드님뿐입니다.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면, 부활 신앙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