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상처의 살아있는 증언자

 


교회는 부활대축일의 기쁨을 하루만 지내기 아까워 8일 동안 그 기쁨을 뻗쳤고, 앞으로도 그 기쁨을 40일간 더 연장시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신앙인들이 온 마음으로 경축해야 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와중에서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자고 하네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 오늘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했을까?’...

 

교회는 부활대축일을 언제 거행하죠? 춘분이 지난 보름날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주일에! 봄이 지나고 만물의 생명력이 왕성해질 때입니다. 이 시기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기에 좋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생명력만큼 엄청난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지금 그 폭발적인 생명력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 봅시다.

 

1. 만약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우리의 모습은 지금 어떻게 드러날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린다면, 그 삶은 참된 자유이고 기쁨이며 자신만의 고유함을 뽐내는 감사와 찬미의 나날이 될 것입니다. 비록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실패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당장 내일 일이 막막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본질적인 자유로움과 기쁨은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를 깊이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어떨 때 두려움을 느끼죠?... 살면서 두렵다고 느낀 적이 많았을 텐데, 그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첫째,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 해 보지 않은 일과 가보지 않은 곳을 방문할 때 설렘도 있지만 뭔가 모를 두려움을 느끼죠.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모름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둘째, ‘상실에서 오는 두려움! 내가 지닌 건강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그리고 아끼던 사람들과 헤어질 수도 있는,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끝으로, ‘고통에서 오는 두려움간접적인 고통을 통해 알게 되는 두려움, 곧 기존의 아픔들이 연상되고 그때까지 겪었던 것들보다 더 큰 아픔임을 앎으로써 연상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무지상실그리고 고통에서 파생되는 두려움이 응축되고 극대화된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두려움의 마지막 모습이죠. 우리가 경험하는 두려움의 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끝은 항상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움이자 한계상황입니다.

 

2.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락방에 숨은 제자들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왜 유다인들을 두려워했겠습니까? 바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겠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뚫은 사람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꿈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꽁꽁 닫혀 있던 그 문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죠? “, 유령이다!” 맞습니다. 그것은 유령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인사하죠? 오늘 복음에서는 젊잖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로 나와 있습니다만, 마태오복음에서는 평안하냐?’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안녕?’입니다. 침통한 슬픔과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제자들에게 건넨 인사말이 고작 안녕?’입니다. 제자들을 그렇게 아프게 또 놀라게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저 안녕?’이라니! 정말 짓-굳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죽음을 초월하신 분께서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고 있자면 그렇게 인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쳇말로 뭘 그리 쪼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3.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인사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건넨 인사말이자, 동시에 오늘 복음에서만 세 번이나 언급된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평화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일컫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 한가운데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와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어도 뱃머리를 베게 삼아 주무셨던 예수님의 그 평화입니다.

 

이러한 평화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것이며,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맺어진 깊은 친밀감에서 파생된 성령의 열매입니다. 또한 이 평화는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간직할 수 있는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이런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4.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결과로서 맞이한 평화를 누리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간적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넨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이 숨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불어넣어주셨던 그 숨결입니다. 이 숨결로써 세상에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되었습니다. 현세에서 천주성삼의 특징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피조물 말입니다.

 

그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사면입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죄의 사면권은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사면권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행하셨던 그 사면권과 동일한 권한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믿는 이들이 현세에서 천상의 삶을 영위하도록 사도들에게 천상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5. 이토록 놀랍고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삶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것은 사람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삶입니다. 이런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긴 사람이 바로 토마스입니다. 그는 그분의 옆구리에 자기의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 상처를 보라!입니다. “네 손가락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 상처는 우리를 위한 표시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한 표시! 우리를 향한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서약! 주님은 죽기까지 그 서약을 지켰고, 부활하셔서 그 서약을 영원히 지키고자 하십니다.

 

그 서약을 바라본 토마스는 마침내 고백하죠.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요. 이 고백은 신앙인이 바칠 수 있는 마지막 고백입니다. 토마스는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믿어왔던 그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 초월적인 모습으로 현존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찾아오신 분이고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분입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교학자들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신관神觀)입니다. 토마스처럼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앎이 형성된 이들은 그때부터 무엇을 했을까요?...

 

6. 사도행전을 봅시다. 그들의 활약상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드리워지기를 바랐다.”(사도 5,12-15 편집)

 

참 놀랍지 않습니까? 죽임 당할까 봐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으니 그들에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이 펼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지요.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죽었었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묵시 1,17-18 편집)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선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전한 삶을 위한 재화 획득, 타인에게 돋보이는 명예, 활기찬 몸, 가족 간의 사랑만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7. 무엇보다 먼저, 토마스 사도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상처를 바라보며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지금 이곳에서부터 천상의 삶을 살기 위해 죄를 끊어버릴 각오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비가 그쳤을 때 노아는 방주의 문을 열고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 생명을 퍼트렸습니다. 주님의 옆구리는 바로 그 문과 같습니다. 주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죠. 물은 세례성사요, 피는 성체성사입니다. 그 물과 피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일백년을 사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가 주님께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마련하신 선물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큰마음으로 죽음의 문화에 저항해서 생명의 문화를, 성장지상주의 문화에 저항해서 존중의 문화를, 경쟁의 문화에 저항해서 협력의 문화를, 이윤창출과 효율성의 문화를 넘어 나눔의 문화를 확산시켜 나갈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얼굴을 보고 믿은 게 아니라, 그분의 상처를 보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8. 제가 이미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생명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죄의 용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평화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자들이 누리는 평화요, 동시에 죄의 용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먼저 죽음을 쳐 이기셨고, 그러고 나서 제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용서의 결과로 맺는 열매가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에는 반드시 아픔이 동반됩니다.

 

토마스에게는 의심의 답이었고 예수님에게는 부활의 명확한 증거, 그것은/ 예수님의 상처였습니다. 아픔 없는 사랑, 아픔 없는 교회, 아픔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공동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악마가 마르티노 성인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속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악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상처는 어디에 있습니까?부활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의 상처에서 시작됩니다.(고태권 신부의 영상 참조) 우리는 이웃에게 주님 상처의 살아있는 증언자가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