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1. 지난주 화요일에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Youtube을 봤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코로나19, 신인류시대라는 특별기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특별기획 7부작 중 제4“New-Normal, -체제는 무너진다.”였습니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 소장은 코로나19 이후, 인류가 지난 40년 동안 쌓아올렸던 체제는 무너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인류가 지난 40년 동안 쌓아올렸던 체제란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 그리고 생태계 위기입니다.

 

그의 전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우리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것을 기다리겠지만, ‘-노멀곧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전망한 새로운 일상이란 우리들의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으로서, “그 누구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입니다.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자니, 저는 사회·경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가 전망하는 세상은 오늘날 북유럽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회주의 제도가 보편화된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세상은 성경이 제시한 세상이죠.

 

문득, 201811월부터 ~ 지금까지 정하상성당 주보 3면에 싣고 있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제시한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원칙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지와 정의(경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고, ‘권력과 도덕(정치)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등.

 

성령께서는 2년 전부터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불안하게 느낄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손길에 의탁하고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훈련을 쌓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미 내 손에 쥐어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더 아름다운 내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나봅시다.

 

2. 우리는 부활대축일에 빈 무덤 이야기를 통해서 이 세상에 죽음이란 없다. 단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라는 엄청난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난주에도 꽤 묵직한 주제를 다뤘었는데,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 그렇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선포되었습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 다음 주일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고 하셨죠. 그러자 토마스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부활의 세계를 믿지 못하던 토마스의 불신을 날려 버린 것은 다름 아닌 구멍 뚫린 주님의 손과 옆구리, 주님의 상처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죽음을 불사하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그 조건 없는 사랑, 겸손한 사랑, 끈질긴 · 항구한 · 철저한 그리고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 사랑을 보고서야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요.

 

유일신을 믿던 한 명의 유다인이 예수님을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경배입니다. 우리도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토마스의 고백,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바쳐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3.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만만치 않은 내용이 선포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처형 이후,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엠마오)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 방향에 있던 마을이었는데,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는 표현에서도 그들의 슬픔과 절망을 알 수 있지만, 그 표현보다 더 큰 상징은 그들이 향하던 마을의 방향과 시간입니다.

 

그들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마주보며 걸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지는 해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21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광야에서 여행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동이 트는 첫 새벽을 향해 나아가는 개척자들이었습니다.(전주원 신부 강론집 35쪽 참조)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세워진 성당의 제대들은 모두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교우들이 아닌 제대를 향해 기도를 드릴 때, 그곳은 어느 성당이든지 모두 동쪽이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고 방향을 모를 때는 성당의 제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를 보면 잃었던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쪽을 향한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분이시고, 신앙인은 항상 그 빛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되새긴다는 의미입니다.

 

엠마오를 향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동쪽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슬픔과 좌절의 발걸음을 기쁨과 희망의 발걸음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4.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두 제자들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면, 우리들의 삶의 방향성이 크게 바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삶을 바라보는 시각,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 죄에 대한 인식, 정의의 기준,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감각까지 모두 바뀔 것입니다. 일명, 가치관이 확 바뀌지요.

 

그래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론이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라고요.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면 자아정체성, 자신의 행동방식, 그리고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의 만남을 갈망해야 마땅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어떻게 해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감동을 간직한 채 예루살렘을 향해 희망찬 발걸음을 옮겼던 두 제자들처럼, 우리도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눈여겨보고 그대로 따라해 봅시다.

 

5. 먼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다가와 묻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자가 주님께 다가가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 출발점이 중요한데, 우리에게는 부활의 세계에서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방식은 우리의 존재방식보다 몇 차원 더 높은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당신 모습을 열어 보여주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알아 뵐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먼저 다가오시죠.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무슨 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왜 그리 심각하냐?”. 그러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일단, 멈추죠. 가던 길을 멈춥니다. “귀찮게 하지 말라, 갈 길이 멀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프다,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 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고 있던 길(하던 일)을 멈추고 본인들을 몹시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일단 멈추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말씀을 드려야 그 다음 들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주님은 그때부터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루카 24,27)해 주시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면, 새로운 안목이 형성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사건은,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비참한 사건이 아니라 경이로운 사건이었음을,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쁨의 사건이었음을, 비극적인 결말이 아니라 승리의 첫 걸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내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 안에 머무르면, 우리도 엠마오의 두 제자들처럼 뜨거운 감동을 맛보게 됩니다. 그 순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된 시간입니다. 그 다음 제자들은 무엇을 했죠?...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말함들음이후에 했던 그들의 행동은 머무름이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라고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목말라 해야 하고, 갈증을 느껴야 하며, 아쉬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떤지요, 정말 아쉬움을 느끼십니까? 도대체 우리가 가장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주님을 목말라 하여 주님을 붙드는 대표적인 시간이 바로 미사 시간입니다. 주일미사는 한 주간의 중심이 되는 시간입니까, 아니면 변두리 시간입니까?...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당에 오는 길에서 주님께 내 삶을 말씀드리는지요?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내 삶을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시는지요? 성찬의 전례를 통해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을 받아 모시며 그분 안에 머무는지요?...

 

한 주간의 삶을 미사로 정리하고, 미사와 함께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고 있다면, 그 미사는 그 사람의 삶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미사참례가 이 일 저 일의 우선순위에 밀려 겨우 시간을 내는 의무 방어전이라면, 그 미사는 삶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겠지요. ‘말함-들음-머무름의 요소를 모두 갖춘 미사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는지요?...(17년 야곱의 우물 묵상 글 참조)

 

일상에서, 특별히 미사 때 더욱 더, ‘말함-들음-머무름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발걸음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항상 먼저 다가와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힘차게 걸어갑시다. “빵을 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30-3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