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유와 하느님의 초대

 


1.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특별기획 코로나19, 신인류시대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8편에서는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가 이제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want)좋아하는 것(like)의 차이점을 설명한 뒤, “좋아하지도 않는데 원하는 것만 추구하다가는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하고, 훨씬 더 많이 빼앗아 한다면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사회·문화에서는 훨씬 더 적은 것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멈추게 하는 것은 만족감이고, 코로나 19 이후 우리 사회는 만족감으로 지혜로워지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라고 기대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지켜본 뒤 한참동안이나 묵상했습니다. 그 심리학과 교수의 전망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제시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좋아하는 것의 차이점을 뚜렷이 구별할 수 있나요?... 원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그 방송을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잠시 부연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풍선을 들고 있으면, 내 손을 쥐고 있던 내 아이도 갑자기 풍선을 사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풍선을 사 주면, 오래지 않아 내 아이는 팔이 아프다며 그 풍선을 놔 버립니다. 그때 주변을 살펴보면 풍선을 들고 있는 아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입니다. 풍선을 들고 있는 아이들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굳이 팔 아프게 풍선을 들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 풍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내 아이는 풍선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원했던 겁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또한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원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줄 아는 역량입니다.

 

2. 여기까지가 그 방송의 내용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제가 그 방송을 보고 묵상 삼매경에 빠진 이유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만족감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정말 오랜 시간 자아를 성찰해야 원하는 것좋아하는 것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욕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영성적인 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욕구, 곧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일치하고 싶은) 욕구 혹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구가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 욕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자각해 가는 욕구로서, 지극히 고유한 개인적 욕구입니다. 좋아함은 이 욕구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은 바로 이 욕구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즉 최고의 만족은 하느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평화입니다. 하느님과 평화롭게 지내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만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구는 Enter Key를 쳐야 활성화(실행)되는 프로그램처럼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지 않는 이상 활성화(성장)되지 않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경외심, )은 배우지 않는 이상 형성되지 않습니다. 한평생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막연하게 눈 뜰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형성된 앎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요. 이런 한계성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대자연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진리 탐구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수많은 아픔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3. ‘그 여정이 얼마나 거칠고 힘겨운지, 그리고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2001년 효성여고에서 교목신부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신입생들 중에서 가톨릭신자 학생들만 불러놓고 특활시간에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껏 열심히 주일학교를 다닌 친구도 있겠고, 세례만 받고 농땡이 친 친구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지금 가톨릭학교에 왔으니까 이 기회를 살려 우리의 신앙도 향상시키고,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친구들에게 가톨릭의 신앙을 알려주자!

 

친구들에게 가톨릭을 알게 해 주면서 우리 각자의 신앙도 함께 성장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위해 나와 학교가 전폭적으로 밀어주겠다. ()교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에 대한 교육도 재미있게 준비해 놓았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가톨릭학생회 회원으로 가입했으면 좋겠는데, 나와 함께 해 볼 사람?”이라고 물었더니 몇 명이 하겠다고 나선 줄 아세요?... 70여 명 중에 딱 한 명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만큼 다른 게 하고 싶은 거예요. 수화, 사물놀이, , 방송부 등. 하고 싶은 게 매우 많은 데 그 중에서 신앙생활은 너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항상 두 번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둬야 할까요?...

 

이런 아이들이 고3이 되었을 때 주일을 지킬까요? 대학교 3·4학년이 되면 신앙생활을 할까요? 취업 준비에 바쁠 텐데... 취업을 통해 경쟁사회에 뛰어들었을 땐 또 어떻게 될까요? 양심과 이해관계가 맞물렸을 때 신앙적 가치에 따라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신앙이 항상 두 번째 선택지가 되면, 정작 삶과 죽음의 문제가 발생할 땐 신앙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항상 두 번째였던 가치가 그 중요한 시점에서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엄청 고민을 한 다음 제 고민을 1학년 담임 선생님들께 말씀드렸더니, 어느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많을 걸 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신자면 의무적으로 가톨릭학생회에 가입시키면 어떨까요?” 다른 선생님께 여쭤 봤더니 신부님께서 하시겠다는 데 누가 입을 대겠습니까?”라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을 끝내고 가톨릭신자 학생이면 가톨릭학생회에 가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겠다. 전공이나 특기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찾아오기 바란다라고 공지했더니, 그때부터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떤 학생은 휴일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다른 걸 해 보고 싶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저런 말로 설득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조금 지나지 않아 그 아이의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하고 통화하고 난 다음, 그 아이가 거의 광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방문을 닫아걸고 울며불며 학교 안 가겠다며 땡깡을 부린다는 것이죠.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요? 신앙이 무엇인지도, 신앙교육을 위해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싫다고만 하는데...

 

4. 그 아이의 모습이 고등학교 시절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제게 신학교에 가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을 때, 저는 죽으면 죽었지 신학교는 절대로 안 간다. 왜 그렇게 험난한 길로 나를 내모느냐? 내가 진짜 이 집의 막내아들 맞느냐?”며 대꾸했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말했던 아이가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런 대화가 오고간 지 1년이 지났을 때 제게 큰 아픔이 찾아왔고, 그 아픔을 통해 저는 신학교에 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랴! 12년간 살다 나오면, 그땐 부모님도 할 말이 없으시겠지. 그때 내 길을 가자는 마음가짐으로 신학교를 가 줬습니다. 말 그대로 가 준 거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입학해 보니까 참 좋은 거예요. 신학교에 진학하고부터 제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습니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전혀 다른 새로움! 스물한 살에 입학해서 사제서품 받을 때까지 약 10년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물론 힘겨움이 항상 따라다녔지만, 기쁨과 감동 · 감탄과 설렘이 있었고, 꿈이 생겼으며, 사막에 심겨진 중국산 대나무처럼 거침없이 성장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성장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제 아버지만이 저보다 더 저의 성향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착한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양 자신들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것처럼!

 

부모님이 잘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 나이가 어렸지만, 그리고 신앙이 뭔지도 몰랐지만, 제게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언제부터 제 안에 자리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께 효도하고픈 마음과 함께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지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갈라티아서 220절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구절은 집을 떠나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제가 집에서 바친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주님, 저 잘 아시죠? 제 성질대로 살았다간 3일 만에 쫓겨날 겁니다. 그러니 제 대신 좀 살아주세요!” 그때까지 저는 제가 바친 기도 내용이 성경에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되짚어 보면, 부모님은 그때 이미 제 안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놓았던 겁니다. 비록 자신의 기호와 맞지는 않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줄 아는 태도를!

 

5. 저의 이런 이력 때문에 저는 가톨릭신자 학생들을 모두 가톨릭학생회에 소속시켰고, 그때부터 저와 아이들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강요받는다는 느낌 없이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제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살았는지?... 이것은 광야에 주님의 길을 내는 것(부활대축일 낮미사 강론 참조)과 같습니다. 정말 어렵지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이자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들은 눈이 어둡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 귀에 익숙하지 않는 목소리를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직 목자의 목소리만 따르는데, 그런데 그렇게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 양들이 목자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 줄 아세요?... 헛간에 깻묵이 탈 때입니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쳐 헛간에 불이 나면, 목자는 헐레벌떡 달려와 양들을 구하기 위하여 헛간 밖으로 양들을 불러내지만, 양들은 이때만큼은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합니다. 왜냐고요?... 불에 타고 있는 고소한 깻묵 냄새때문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깻묵을 먹으려고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움켜쥐고 싶은 게 있을 때나,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하느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다른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파국으로 치달은 후 뒤늦게 가슴을 치며 후회할 값이라도...>(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 180-181쪽 참조)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그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좋아하는 것을 구별하기도 어렵지만, 비록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식별해 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에는 그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다시 말해, 비록 그것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어디에 활용한 것인지는 하느님의 손에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냐고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최고의 만족에 이를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제로 특강을 해 보고 싶은데,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낼 만큼 양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착한 목자입니다. 양보다 양에 대해 더 잘 아시고, 양보다 양을 더 사랑하시는 분께서 양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시는 목적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기 위함(요한 10,10)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들이 목자의 말을 안 듣는다는 데 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신학교엔 가지 않겠다며 버티던 저처럼 말입니다. 가진 게 하나도 없었으면서 내 것을 버리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요? 그것을 포기하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가진 게 없었던 제가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가진 게 있는 사람이라면 오죽할까요?...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포기추종을 배워야 합니다. ‘참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내 영혼에 각인시켜 준 그 욕구와 마주치기 위해서는! 신앙적 기호도가 왕성해져 마침내 그분이 원하는 것을 나 또한 원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나 또한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Junk Food에 길들여진 사람이 바로 옆에 차려진 진수성찬에 눈길을 돌릴 수 있을까요? 일단 배가 부르면, 그 옆에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하더라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 진수성찬에 맛들이고 몸이 튼튼해지기 위해서는 일단 Junk Food를 끊어야 합니다. Junk Food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진수성찬이 몸에 좋다는 것을 백날 이야기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할 수 있는 한 Junk Food를 끊게 해야 하고, 최소한 먹는 빈도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진수성찬을 맛보게 할 수 있습니다.

 

6. 그렇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좋아함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각인시켜 주신 욕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Junk Food를 줄여 식욕을 키워야 하겠죠. 진수성찬을 맛보기 위하여 배가 고프더라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깻묵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번개에 맞아 타고 있는 깻묵을 향해 돌진하는 양들을 저지시키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번개에 맞지 않게 깻묵 관리를 잘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양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문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리스 성경에는 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수많은 문들 중에 하나의 문이 아니라, 양들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9-10)

 

7. 교우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자녀를 키워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린이들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순수함순진함은 다른 개념입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못된 구석이 있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부모에 대한 어린이들의 신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뛰어라고 하면, 그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 내립니다. ‘아빠가 날 잡아줄까, 잡아주지 않을까? 바닥에 떨어지면 난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뛰어내리라고 하면 그냥 뛰어내립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며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협력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도 이와 같습니다. Abba 하느님에 대한 의탁과 신뢰는 하느님 나라에 있어서 필수사항입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Abba 하느님에 대한 어린이 같은 의탁과 신뢰가 있었지요. 그녀의 그런 덕()을 통해 이 세상이 구세주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성모님을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삶에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응답한 신앙인들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의 덕을 본받아 지금-여기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나날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