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1. 교회는 1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인 5월을 성모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싱그러운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 같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는 건강하게 성장했지요.

 

저는 5월이 되면 특별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의 어머니는 61여를 낳으시고도 교편생활을 하시면서 집안을 꾸려나가셔야 했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셨습니다.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셔서 빨래하고 밥하고 집안 청소하고, 그리고 형들 도시락 싸주고 나서 학교로 출근하셨습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오시면 급히 저녁을 드시고, 설거지 하시고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아니 잠들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어머니는 이런 생활을 40년 동안 하셨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 전에 저는 가끔씩 출근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면서 나랑 같이 놀자며 떼를 쓰곤 했습니다. 떼쓰는 막내가 안쓰러웠겠지만,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시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내빼셨지요. 저는 자전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면서 뒤따라갔지만, 자전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뒤쫓아 가는 나도 울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내빼시던 어머님도 속울음을 많이 삼키셨을 겁니다. 이렇듯 저의 어린 시절엔 눈물이 참 많았습니다.

 

사춘기 때는 심하게 대든 적도 있었습니다. ‘엄마가 내게 해 준 게 뭐 있냐?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때려보라. “때려 봐, 때려 봐!”라면서 볼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를 때리지 못했습니다. 안 때린 것보다는 못 때리셨습니다. 저한테 그렇게 무시를 당했으면서도 나 잘되기만을 기도하셨습니다.

 

끝까지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는 흔히 남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잘되기 보다는 오히려 시기하죠. 남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괜히 우울해 지고, 자꾸만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만을 끝까지 기원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성월을 맞아 우리도 부모의 마음, 특히 어머니의 마음을 청했으면 합니다. 만약 제 어머니가 제가 잘 되기를 마지막까지 바라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저는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희생)을 몰랐을 겁니다.

 

2. 여러분, 비누 쓰시나요? 비누는 쓰면 쓸수록 물에 녹아 없어지는 하찮은 물건입니다. 하지만 그 하찮은 물건이 우리의 때와 병균을 씻어 줍니다. 좋은 비누일수록 물에 잘 녹지요. 물에 잘 녹지 않는 비누는 좋은 비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희생보다는 자기 안락의 길을 갈 때, 곧 자신을 죽여 남 살리는 일에 앞장서지 않을 때, 세상의 때는 씻기지 않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희생 보다는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발생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몫을 나눌 때 스스로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하지요. 이러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이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이 쉼 없이 버려질 것입니다. 그 사회는, 더불어 살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20여 년 전에 황금 해안’(golden coast)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 호주에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당신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냐?”... 가장 귀중한 것 1위는 어린이가 나왔습니다. 2위는 장애인’, 3위는 노약자라는 응답이 나왔는데, 이 설문 결과가 제게는 참으로 놀랍게 다가왔었습니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귀하게 볼 수 있다니!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존엄한 존재입니다. 겉모습이 어떻든 인간인 한 존엄합니다. 장애를 가졌거나, 병으로 죽어가거나, 가난해서 구걸을 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다 존엄(尊嚴. dignity)합니다. ‘존엄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인품 등이 높아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9조에도, 세계 인권 선언 제1조에도 인간은 존엄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인간을 이렇듯 존엄한 존재로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회적 약속을 넘어서서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기반으로 한 신념입니다. 인간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에,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기에 존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은 존엄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짙은 어둠이 여전하죠. 여전히 수 억 명의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곳곳에서는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기득권자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여전히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버려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둬야 할까요, ‘희망이라는 게 있긴 있는 걸까요?....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실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마저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3.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바로 그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희망은 오직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라고 표현되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요한 14,6)

 

세례성사를 거행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느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 이성, 그리고 대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나의 Abba’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혈육에 의한 자녀든 입양에 의한 자녀든 자녀는 모두 자기 부모와 같은 본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은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5,1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그분처럼 되게 하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습니다. 사람의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겁니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 하느님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로마 5,17; 갈라 6,15)이 되었고,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런 진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라고요.

 

4. 오늘 복음은 이와 같은 신분의 변화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를 다시 돌이켜보게 합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에 하신 것으로 그 문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지금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6-38)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하시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집에는 너희들이 묵을 곳이 많다. 나는 그것을 마련하러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너희는 그저 너희를 향한 내 사랑만을 믿어라. 나를 믿고 내 아버지만을 믿어라!”

 

5. 참된 사랑은 모든 죄와 죽음을 넘어섭니다.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합니다. 우리는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사랑을 받고 있고, 또 그런 사랑을 하도록 초대받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