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것을 품기 위하여 움켜쥔 주먹을 펴자!

 

 

1. 요즘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를 자주 시청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남한까지 오게 되었으며, 남한에 정착하면서 보고 느낀 점은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일상이라는 이름하에 제가 놓치고 있었던 게 무엇인지를 떠올려 볼 수 있어 매우 유익하게 느껴집니다.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가족 중 누군가 죽거나 다시 북송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남한에 성공적으로 도착한 나머지 가족들은 안도감과 함께 밀려드는 죄책감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들의 정신 상태가 온전할 리 없겠지요. 기쁨과 죄책감, 설렘과 절망 등 온갖 감정들이 정신없이 뒤섞여 감당해야 할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한 사랑 혹은 남아 있는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그 처절한 몸부림에 의미를 갖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지요.

 

2. 그들의 체험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랑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마더 데레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려면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갖게 해 주십사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 사랑은 섬김의 형태로 드러날 것이고, 마음속 깊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얻습니다. 평화, 기쁨, 사랑, 믿음, 순수한 마음, 우정 등.”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행위입니다. 세상을 탐험했던 탐험가 중 수도자가 된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취이며,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로맨스다라고요.

 

온갖 세상사에 얽매여 살면서도 우리가 사랑만큼은 놓치려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의도는 우리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일찍이 제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평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평화, 기쁨, 자유, 거룩함 등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3. 다시 한 번 사랑의 특성을 떠올려 봅시다. 누구든지 사랑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물건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으며, 사람일 수도 있고,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들 중에 하느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변적입니다. 다시 말해, 모두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목숨처럼 아꼈던, 아니 내 목숨보다 더 아꼈던 것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허무하기 이를 데 없죠.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그 고통(상실감)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지만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천지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상관없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사건이 휩쓸리든지 상관없이 삶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일명, 사람들과 사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사랑하게 됩니다. C.S.루이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귀한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비로소 나는 그 사람을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할 수 있었다라고요.

 

4.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바치는 성모송을 음미해 봅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한 이유가 뭐라고요? ‘그분이 주님과 함께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총)하느님과 함께 머무름입니다. 사람이 기뻐해야 할 가장 큰 이유 또한, ‘임마누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고,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사 43,4. 공동번역)이라고 고백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아쉬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삶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요?... 문제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의식(생각)입니다. 사람들과 사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나의 해석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론이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람 한 사건을 만나는 것이다라고요. 삶에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은총도, 행복도, 기쁨도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평범해 자신이 놓치고 있을 뿐!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마지막 선물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 제2독서로 선포된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봅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1베드 3,15)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를 청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성모님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름이라는 것을 아셨고, 믿었고,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성모님처럼 용기를 내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선물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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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러분, 사랑의 특성 상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했죠. 하느님이 그 대상이라면, 그분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시고 내 안에 머물러 계셔서, 내가 만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사랑의 특성 중 하나가 함께 머무름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결코 헤어지길 원치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처참한 죽음조차도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면 알게 됩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설사 내가 죽음을 맞이할 지라도,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게서 나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파견하는 이유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6.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여기서 계명 준수란 주일을 지키고, 교무금을 내며, 교회법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일명, 밖으로 드러나는 종교생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 이전의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새로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이죠. 그 사랑은 밖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마음속 지향이고, 그 지향은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움켜쥔 주먹을 펴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선은 내 것을 잘 유지하는 것이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의 함정에 대비하여 스스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주먹도 쥐지 않은 채 투쟁하지 않는다면, 나는 빈곤해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평범한 만족을 찾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 만약 내가 손을 펴고 있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못을 박아 버릴 것이다라고요.

 

계명 준수란 이런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주먹 뒤에 또 다른 주먹이 숨어 있어, 주먹을 움켜쥐는 여정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주먹을 움켜쥐게 한 일들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발생했고, 지금도 낮이나 밤이나 근심 걱정으로 또다시 주먹을 쥐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이끌리도록 내맡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정표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숨결이 가져다준 자유만이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위협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움켜쥔 주먹을 펴는 게 두렵습니다. 제가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다면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당신 앞에 빈손으로 서는 게 저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주님, 제가 용기를 내어 조금씩 제 손을 펴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제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임을 깨닫게 해 주세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움켜쥔 주먹을 펴는 사람입니다.>(열린 손으로, 25-28.48.57쪽 편집)

 

<7. 움켜쥔 주먹을 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파견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예수님께서 성령을 파견하신 이유,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머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4,18)는 말씀은, 성자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요한 14,21) 역시, Abba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십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이 확실하게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잃을지라도 제자들은 결코 내동댕이쳐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런 진리를 일깨워 주는 존재가 바로 성령이십니다.(요한 14,17 참조)>(17년 야곱의 우물 묵상 글 참조)

 

8. 교우 여러분, 어려운 내용이지만, 요한 14,20절 말씀에 주목해 봅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우리의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올바르게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성부께서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성령을 시켜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십니다.”(로마 8,10-11 편집)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는 사랑 속에 영원히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죽음을 없애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에 우리가 못 알아들을 것을 염려하여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기 전에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고요. “죽더라도 살고는 세상 종말에 모든 인간이 부활한다는 뜻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당신을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코 죽음을 맛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진리를, 곧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요한 14,17)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생명의 빛 안에 머무는 것이고, 이것을 모르는 것이 죽음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 8,12절에서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요. 성령 안에 머물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존재라는 것과, 그래서 어떤 일을 겪을 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등을 깨닫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머물면 이렇듯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데, 우리가 어찌 성령을 거부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하느님을 나의 Abba”,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니까요. 우리는 세례성사 때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았을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 머물라는 권고는, 다름 아닌 성령의 활성화를 의미합니다.

 

9.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령 안에 머무는 비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강론 후반부에서 첫 번째로 다뤘던 내용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움켜쥔 주먹을 펴는 것, 그것이 곧 성령 안에 머무는 비법입니다. 우리가 움켜쥔 주먹을 펴도록 계속 시도한다면, 우리는 오늘 1독서에 등장하는 필리포스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사도 8,5-17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요?...”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