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영입 운동과 공동체 의식

 

 

1. 오늘은 한 남자의 인생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내가 열여섯 살 될 때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정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에 공개적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나의 친척들은 그 일로 인해 나를 비롯해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멀리했습니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 북한을 도왔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적용되어 피해를 입을까 봐 염려하는 모습처럼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배 다른 스무 살 형도 아버지를 돌봐드리다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국가를 배신한 아버지를 전향시키는 것을 돕지 않고, 오히려 국가를 전복시키는 데 동조했다는 게 형에게 부여된 죄목이었습니다.

 

생계 수단을 잃은 어머니는 친척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사실, 어머니는 여섯 살 된 나와 네 살 배기 여동생을 먹여 살릴 일이 막막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의 친척들은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가족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빨리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며 윽박질렀죠. 그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우리들은 아버지의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동냥을 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들은 우리를 환대해 주었고,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는 심정으로 우리를 돌봐주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밝았고 힘이 넘쳤지요. 그들과 우리는 모두 가난했지만, 행복했습니다. 나 또한 거친 생활이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추구하셨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국가와 아버지의 친척들은 아버지를 배척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이 옳다고 믿으셨고, 아버지의 선택을 존경하셨으며,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 아버지의 삶이 옳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마을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도 내가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 어엿한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와 내 여동생을 돌봐 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내 마을 사람들, 더 나아가 우리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생겼습니다. 이런 힘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가 추구했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알던 분 중에서 지혜롭다고 알려진 분(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어 살고 있던 조동섬)을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그분을 만났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서 추구하셨던 삶과 인생의 의미,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웠습니다. 마침내 나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 소중함을 위해 내 삶을 투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의 깨달음을 존중했고 전폭적으로 내 삶을 응원해 주었습니다.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19년 동안, 거의 매년 한 번씩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동지사 사절단에 섞여 찬바람을 맞으며 변문을 지나 북경을 다녀오는 일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자금을 대는 후원자가 없으면 도무지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꿈이 있었고, 내가 꼭 해내야만 하는 시대적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나의 끈기와 후원자들의 헌신으로 인해, 마침내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로마 교황청과 연결되었습니다. 조선에 고립된 우리가 세계교회와 Network을 형성했다는 것이 어쩌면 나와 내 동료들의 공로라면 공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회적인 후원이 아닌 지속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 나라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입니다.

 

어느덧 나의 시대적 사명이 다했는지 내 나이 사십대 중반에 국가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국가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만 우리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국가의 정책이 부당함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는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적어 놓았습니다. 내가 적어 놓은 편지를 읽어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나의 삶에 대해서 한 치의 후회도 없으며, 다가올 나의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가 확산되도록 더 이상 기여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나로 인해서 어머니와 여동생도 사형을 당하겠지만, 그들 또한 나와 같은 마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겠기에 흔들림은 없습니다. 고단했지만, 불꽃같이 살다 떠나는 삶!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아버지와 형, 나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모두 사형 언도를 받고 이 세상을 떠나지만,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가족 모두 영광의 월계관을 쓰고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뜁니다. 여러분도 우리 가족처럼 정말 소중한 것을 붙잡고 기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2. 여러분, 여기에 등장하는 는 누구일까요?... , 그렇습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입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순교자 대축일에 특별히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만큼, 한국 천주교회에 엄청난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정하상 성인과 그분의 동료들이 세운 공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북경교구에 종속되어 있던 조선 공동체를 하나의 교구로 설정하게끔 이끈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고립된 조선의 신앙 공동체를 세계교회에 알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교구로 인정받게 했으며,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조선에 사제를 파견하게끔 이끌어 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소멸되어 가던 신앙 공동체에 다시금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장본인들이 바로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이었습니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교회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 주었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하셨고, 정약종, 강완숙, 이존창, 유항검 등 조선교회의 지도자급 인물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직자를 비롯해 지도자급 인사들이 순교한 것과 더불어 신유박해는 조선교회의 신자 구성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에서 1801년 신유박해에 이르는 10년 동안 조선교회에서 양반층 신자들이 대거 이탈했습니다. 이것은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북경교회의 명령이 전달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의 구심점이 바뀌었습니다. 양반층 신자에서 평민층 신자로!

 

교회의 구심점이 바뀌자 교회 내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새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의 길을 이끌어 줄 사람들이 모조리 처형되거나 유배되어 교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박해에서 용하게 살아남아 지방의 각지로 흩어진 신자들 또한 천주교를 적대시하는 비신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귀양을 갔던 신자들이 유배지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가 하면, 지방으로 피신했던 신자들이 비신자들의 감시와 경계를 벗어나 산골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한양과 지방 도시에만 머물렀던 천주교가 조선 사회 전체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박해를 이겨낸 신자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에서도 탁월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보다 더 궁핍한 신자들을 도왔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이 불행한 시절이 오히려 교우들의 우애를 깊게 만들었으며,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앙 공동체 안에 보다 분명하게 정착된 단어가 바로 형제님, 자매님이란 단어였습니다.

 

형제자매’(교우)란 단어는 비록 피를 나눈 친인척은 아니지만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아끼고 도와주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신분 차이가 크다 하더라도, 아무리 연륜 차이가 크다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몸이라는 뜻에서 형제자매란 단어가 정착된 것이죠. 이렇듯 형제님, 자매님이란 단어는 우리가 깊이 간직해야 할 고귀한 유산입니다.

 

학식이 좀 더 높은 신자들은 자기 집안이나 이웃에 있는 신입 교우들에게 기도문과 교리 가르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고, 신자들 가운데 남보다 더 헌신적인 열의를 지녔던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식이나 명성을 바탕으로 교회를 재조직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일이나, 주변의 신자들을 돌보는 일만으로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지를 다니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냉담한 마음을 녹여 다시금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교회 서적을 베껴서 배포하는가 하면, 신자들 사이의 내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일도 떠맡았습니다. 이런 교회의 재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인물이 바로 정하상 바오로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자 각자가 신앙을 회복하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 해도, 그리고 학식이 있는 신자가 새로 들어온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 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에 성직자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온갖 시련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힘을 받아야 했고, 그 힘은 성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그 성사는 오직 성직자만이 줄 수 있었기에 교회 재건의 최종적인 도달점은 목자를 모셔오는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의 가장 큰 생각과 가장 중요한 소망은 바로 성직자 영입 운동의 재추진이었습니다.

 

3. 조선교회가 새로운 목자를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수립하자, 이여진이 북경으로 가는 밀사를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1811년 이여진을 북경으로 보낼 준비가 끝나자, 조선교회의 지도자들은 두 통의 서한을 작성했습니다. 하나는 교황에게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경 주교에게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여진은 두 통의 편지를 몸에 지니고 북경으로 갔습니다. 막상 북경에 도착했으나 어디로 가야 천주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지, 또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극적으로 포루투갈 선교사(리베이로 누네스 신부)를 만나 편지를 전달하고 맙니다. 그때 교황에게 올린 편지가 3년 뒤에 실제로 교황 비오 7세의 손에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 교회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갈등을 겪던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납치되어 오랜 연금생활을 하다가 1814년에야 풀려나 로마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였지요. 유럽 각국에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무신론이 확산되어 성소자가 격감했고, 교구 및 수도회의 재산은 몰수당해 선교사 파견을 위한 재정 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럽 교회와 교황청은 조선교회를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교회는 다시 한 번 북경으로 가서 성직자 파견을 청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여진이 임무를 맡아 북경으로 갔습니다.(1813년 말) 하지만 북경교회는 당장 성직자를 조선으로 파견할 수도, 나중에 파견하겠다는 약속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마카오에 있던 북경 교구장은 조선 신자들이 또다시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 파견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떤 방법이 가능할지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이여진 등이 추진한 성직자 영입의 시도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조선 내에서는 계속해서 교회가 재건되고 있었습니다. 박해의 불안과 위협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황에서도 조선의 신자들은 오히려 성직자를 모셔 와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했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그리하여 1816년에 다시 성직자 영입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스물한 살의 정하상 바오로였습니다. 정하상과 유진길, 그리고 그의 동료들로 인해 성직자 영입 운동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그 여정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시간 관계상 그 드라마틱한 여정을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마침내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1831년에 조선 대목구가 설립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조선 천주교회는 안정적으로 목자를 모실 수 있게 되었지요.(한국천주교회사2, 152~171쪽 참조)

 

4.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183612월 최양업 · 최방제 · 김대건 등 세 명의 조선인 신학생을 중국까지 안내했던 사람도 정하상이요, 그 이듬해 12월 제2대 조선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을 밀입국시켜 자기 집에 모신 사람도 정하상이었으며, 주교님을 모시고 신자촌을 순방하며 교우들을 돌본 사람도 정하상이었고, 1839년 기해년에 박해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되었을 사람도 정하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하상은 그때 이미 앵베르 주교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무엇을 묵상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열정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신앙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비록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처형당할지라도, 비록 산간벽지에서 거친 생활을 하며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었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았고, 모든 것을 투자해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둘째, 그들의 공동체 의식입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신들의 재능과 재산을 기꺼이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바꿔 말해, 그들은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한 마음이었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화론적 삶을 종말론적 삶과 연결시킨 모습입니다. 종말이란 미래에 다가올 어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살아내야 할 사건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끝으로 묵상해 볼 내용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교회는 신유박해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그 박해를 계기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체되었고, 서울과 지방 도시에만 머물러 있던 복음이 조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달레 신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려버렸습니다.” 따라해 봅시다.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려버렸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 십자가의 참 승리가 숨겨져 있음을 믿고, 십자가 위에서 그냥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5. ‘하느님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불어 닥친 코로나 사태와 성직자 영입 운동의 의미를 연결시켜 묵상해 봅시다. 코로나 사태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선포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엮여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물질주의 가치관개인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코로나 사태는 인간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너희들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함께 살 수 있는 체제를 서둘러 마련하라!”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너희들 안에 간직하라.”(필리 2,4-5 편집)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사회에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펼쳐진 성직자 영입 운동과 공동선을 촉구하는 코로나 사태는 그 맥락이 같습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은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자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게 아니었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온갖 시련을 이겨내는 공동체를, Abba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코로나 사태가 촉구하는 메시지 또한 이 땅에 공동선을 실현하라는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는 신앙 선조들이 펼쳤던 성직자 영입 운동의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 타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참되고 순수한 사랑이!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요청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던, 그것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던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노벨 평화 수상자 엘리 위젤이 했던 말이 가슴을 때립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무관심 때문에 사람은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죽어버린다.”(DOCAT 224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