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핵심 낱말

 

 

104일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지요?... 저에게는 가난, 평화의 기도, 태양의 찬가, 그리고 오상! 이렇게 네 가지 요소가 떠오릅니다.

 

1. “쓰러져 가는 내 교회를 돌보라는 계시를 받은 프란치스코는 자기 고을에 있는 성 다미안 성당을 고치지만, 성령께서 고치라고 한 것은 실상 교회 전체를 의미했지요. 프란치스코는 부유함으로 쓰러져 가는 중세 교회를 청빈의 덕으로 바로 세운 성인입니다.

 

2. 프란치스코가 만든 평화의 기도는 아무리 바쳐도 물리지 않을 만큼 좋은 기도입니다. 저는 외롭거나 제 삶에 회의가 들 때 이 기도를 바치곤 하는데, 혹시 이 기도문 암송하는 분 계세요?... 좋은 기도는 보약과 같아 암송할수록 영과 육에 도움이 됩니다. 이 기도를 모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한다? ‘벼루빡에 딱 붙여놓고 암송합니다. , 같이 따라해 보겠습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소서.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에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주님, 저로 하여금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평화의 기도를 바치다 보면,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이 나의 피붙이처럼 느껴질 수 있나 봅니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에 태양의 찬가라는 아름다운 성가를 만들었지요. 혹시 태양의 찬가 아시는 분?... “,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 감미로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 아름다워라. 어머니이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아름다운 성가를 어떤 상태에서 만들었는지 아세요?... 1224년에 프란치스코는 몸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시력을 거의 다 잃었고, 다양한 육체적 아픔을 겪을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듯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성가를 남길 수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쇠약함과 아픔까지도 그리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봉헌했기에 자기 삶의 모든 것에서, 창조된 모든 것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남김없이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죄마저도 주님께 봉헌했던 것 같습니다.

 

4. 오상을 받았다는 것은 완전히 주님을 닮은 모습이죠.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주님을 닮고 싶어 했기에 주님께서 오상을 허락하셨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고자 했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벌레들이기에 우리의 육신을 수치와 멸시를 받을 만한 것으로 여깁시다!”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만들어낸 거짓 자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질투하는 나, 남을 탓하는 나, 자랑하는 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나, 나를 싫어하는 형제를 나도 같이 증오하면서 속을 끓이는 나, 약간의 멸시와 모욕 앞에서도 힘들어 하는 나, 약간의 칭찬에 흐뭇해하는 나, 충고를 싫어하는 나,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나, 높은 직책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지닌 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 증오의 대상자를 제거하려는 나’,

 

이런 내 모습은 스스로 만들어낸 자아때문에 발생합니다. 내가 만들어 낸 자아가 인정받지 못하거나 충족되지 않기에 스스로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자아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자아가 내 불행의 원인입니다.

 

흔히 라고 여기는 그 가 허상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본래의 벌레 같은 자기 모습을 외면하고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며 내가 되려고 발버둥 친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오류와 불행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자아를 벌레(구더기)로 규정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곳에 어린이처럼 머물러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프란치스코와 달리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를 진짜 자기로 여기고 의지를 자신의 소유로 여겨, 본래의 자아로부터 탈피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침으로써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요?...(한국가톨릭대사전 프란치스코참조)

 

주님께서는 우리의 벌레 같은 이런 모습 때문에 고통을 받으셨지만, 사랑으로 그 모습조차도 품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랑이 창조된 우리 본래의 모습임을!)

 

5. 루카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며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실상 필요한 한 가지란,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의 영혼이 이미 빛나고 있고, 그 빛은 우리의 죄로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 혹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해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가난이고, 그 사랑과 가난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선물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알려주신 주님께 찬미드리고, 주님을 닮은 프란치스코에게 고마워합시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은 조롱받고 거절당할 수 있지만,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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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4모순으로 느끼는 분들을 위한 부연 설명

 

우리의 정체성은 질그릇에 담긴 보물입니다. ‘질그릇이 우리 본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투박하고 보잘것없고 허무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벌레 같은 존재(구더기)입니다. 이 모습을 외면할수록 혼란스러워지고, 벗어나고자 발버둥 칠수록 허무만이 짙어질 뿐이죠. 우리는 질그릇같은 이 모습을 회피하지 않고, 합리화시키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 그것이 진실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방황을 줄이고, 훗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자신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바탕이니까요!)

 

그런데 이 모습만 있다면 절망 그 자체, 허무함 그 자체일 텐데, 놀랍게도 하느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질그릇 같은 존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참되고 순수한 사랑 자체시기에! 그리고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특별히 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 혹은 하느님의 사랑이 질그릇에 담긴 보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양면성이 상존(항상 존재)합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질그릇같은 모습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겸손을 배우고, ‘보물을 바라보며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을 쉼 없이 충실하게 걸어가는 것이 영성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희망 간직한 채 하느님의 평화(필리 4,7; 요한 14,27)를 누리고 나누는 나날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