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분은 누구신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많은 이적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군중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군중 중의 일부는 이런 것 저런 것 떠나 단순히 그분이 일으킨다는 기적만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사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외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가시적인 볼거리를 찾아다니지 말고, 여러분의 회개에 주력하십시오. 자신의 회개에 주력하다 보면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일 겁니다. 사실 이 사람은 요나 예언자보다도, 솔로몬보다도 더 큰 사람입니다.”(루카 11,29-32 참조)

 

저는 요즘 예수, 그분은 누구신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꾸 딴청을 피우려 합니다. 제가 사제로 살아가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딱 부러지게 말씀드려야 하지만, 자꾸 머뭇거리게 됩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제가 아는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대로 살지 못하면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아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루카복음 11장에 나오는 군중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다가선다면 예수님의 참 면모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서가 메말라 몹시 힘들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목마름으로 고통 받을 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메마른 가슴으로 드리는 찬미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성인들과 천사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복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지금-여기에서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여기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서적 황량함은 뭔가를 얻기 위해 기도했던 제 태도를 바꿔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뭔가 모를 자유로움이 느껴졌고, 그 전에는 몰랐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새로워졌지요.

 

신앙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노예의 신앙, 상인의 신앙, 그리고 자녀의 신앙! 두려움 때문에, 벌 받을까봐 하느님을 믿는 것은 노예의 신앙입니다. 이득을 염두에 두고 거래하듯 믿는 것은 상인의 신앙입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 사랑에 찬 응답으로서 믿는 것은 자녀의 신앙입니다.

 

창조주를 나의 “Abba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성부께서 이미 좋은 것을 다 만들어 놓으셨다. 내가 회개한다면 지금-여기에서 하늘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의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임만은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이 모두를 얻느니라. 임을 모시는 이 아쉬울 것 없나니, 임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최민순, 두메꽃)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