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5)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조건을 걸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이라고 단서를 붙인 것은, 상처받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의무 조항을 붙여 놓아야 자신의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하고자 노력할 것이 아닙니까.

 

용서는 윤리적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히려 양도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양도할 수 없다는 말은 어떤 명분을 갖다 대더라도 내어줄 수 없다는 뜻이죠. 용서가 양도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라는 말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화가 난 나머지 나를 물고 달아난 그 독사를 쫓아가서 산산조각 내야할까요, 아니면 빨리 병원에서 가서 독을 빼내야 할까요? 독사를 찾아가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게 현명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실천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게 용서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나와 둘도 없이 가까웠던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피해 규모가 컸다면, 그만큼 용서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집니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신 예수님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당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미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움을 철저하게 파괴하심으로써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누군가 미워서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순간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나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이렇듯 용서하기 어려운데, 저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당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용서해 줄 수 있었을까? 그렇구나. 저분은 그렇듯 큰 사랑으로 지금도 내 죄를 용서해 주고 있구나. , 저분은 사랑 그 자체로구나!’ 내가 미움에 떨고 있을 때 바로 그때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이 역설!

 

잊어버리는 것, 묵과하는 것, 그냥 참는 것, 사과하는 것, 서둘러 화해하는 것, 법적인 보상을 하는 것 등은 용서처럼 보이지만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나에게 부당한 상처를 입힌 그 사람에게 사랑과 관대함과 연민을 갖고 아무런 사심 없이 행동하려는 의지입니다. 용서란,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려는 의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용서가 잘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미운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께 양도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를 청해 봅시다.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