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때로 슬픔도 힘이 된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39~45) 언뜻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수긍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때로 인생의 약이 될 수 있다는 말, 슬픔이 때로 힘이 될 수 있다는 말... 아쉽지만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애착을 끊어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의 기쁨을 만끽할 가능성도 있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출가(出家)를 감행합니다. 사서 고생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던 탄탄대로를 벗어나서 일부러 가파른 언덕길을 선택합니다. 안락함과 따스함을 포기하고 신산(辛酸)하고 고독한 삶을 선택합니다. 때로 훌훌 한번 털어버리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보면 얼마나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모릅니다. 때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보면 그리 나쁜 기분만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완전히 비운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너무도 쉽게 임하십니다. 편안하게 당신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그때 우리 삶은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수직상승할 좋은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현실적인 눈,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기구한 두 여인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너무나 이상한 만남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만남입니다. 한 여인은 노인인데 해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이상한 나머지 뒤에서 말들도 많습니다. 다른 한 여인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정식으로 혼인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큰 일 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이런 기막힌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어이없는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두 여인의 만남은 기쁨과 감격, 행복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환희의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던 나머지 두 여인은 부둥켜 앉고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한편의 코미디 같은 장면이지만,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할 수 없는 은총의 분위기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너무나 이상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쓰러운 만남이겠지만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니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만남으로 변화되는군요.


수난은 인생의 완성이며 목표이다. 우리 인생은 수난의 의미를 깨닫고 동참할 때 완성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예수님의 인생 마지막에 전개된 수난사 때문이다. 수난을 당하시는 그분의 얼굴에서 우리가 희망해왔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이 내 힘을 죽인 곳, 모욕과 침 뱉음과 폭력을 다 참아 받아들인 곳에서 인생은 꽃을 피우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얼굴은 비록 고생으로 주름이 깊게 패였을지라도 평온하다. 아름답다.”(이제민 신부, 수동의 영성)

 

구세사의 가장 큰 주역인 두 사람,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낸 두 나무는 마침내 선구자였던 세례자 요한과 구세주였던 예수님을 활짝 꽃피워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오랜 의혹과 안타까움의 세월을 끝까지 잘 견뎌내었으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구세사 안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으로 길이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강론 편집 -